"잼 윤현숙에 반해 방송댄서 입문했죠"
"K팝 열풍에 안무 기여도 50% 이상…전체적 퍼포먼스 중요"
[※ 편집자 주 = 세계 음악시장에서 K팝의 위상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로 나아가는 단계로, 그 과정에는 스태프부터 경영진에 이르는 많은 여성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음악시장의 '큰손'인 여성 팬덤의 마음을 잘 아는 건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연합뉴스는 음악·공연계에서 우먼 파워를 가감 없이 발휘하는 리더들을 만나 음악 한류를 이끄는 노하우를 세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제 피붙이가 춤을 업으로 삼겠다고 해도 전 해보라고 할 거예요. 이 바닥, 무서운 곳이지만 그만큼 매력 있거든요."
안무가 배윤정(38)은 춤 하나로 업계 최고가 된 인물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엠넷 '프로듀스 48'의 카리스마 넘치는 댄스 트레이너로 주목하지만, 현역 댄서일 때 이력은 더 화려하다.
그는 전홍복 단장이 이끄는 남성 안무팀 '야마'와 자신이 이끄는 여성 안무팀 '핫칙스'를 합쳐 '야마앤핫칙스'를 세웠다. 야마앤핫칙스는 국내 안무팀 최초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회사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곳에서 브라운아이드걸스 '아브라카다브라'의 시건방춤, EXID '위아래'의 골반춤, 카라 '미스터'의 엉덩이춤, 티아라 '보핍보핍'의 고양이춤 등이 탄생했다.
귀여우면서도 야하고, 따라 하기 쉬웠다.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온갖 예능, 축제에서 배 단장이 만든 춤이 재해석됐다.
심지어 월드스타 싸이는 '젠틀맨' 안무에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시건방춤을 인용할 때 저작료를 지불했다. 음악처럼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 안무계에서 저작료를 받기는 야마앤핫칙스가 처음이었다.
그는 지난달 25일 인터파크, 티엔네이션엔터테인먼트와 손잡고 K팝 아카데미 '스테이지631'을 개원해 원장으로 취임했다.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교육 수요는 늘었지만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숱한 '최초' 타이틀을 차지한 배윤정을 최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만났다. 왜 춤이 좋았는지, 힘겨웠던 시절은 없었는지, 최고의 자리에 오른 비결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일문일답.
-- K팝 인재양성소 '스테이지631'에 합류한 이유는.
▲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춤추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친구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죠.
-- 언제부터 춤을 췄나.
▲ 중학교 때요. 잼(1993년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윤현숙 씨를 정말 좋아했어요. 남자들 사이에서 춤추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10대들도 춤출 수 있는 콜라텍을 다녔어요. 학교에서는 나름 저도 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춤 잘 추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그때 만난 어떤 오빠가 '가수 백댄서로 같이 가볼래?' 하기에 졸래졸래 따라간 게 정식으로 춤에 입문한 순간이었어요.
-- 연습생 생활은 어땠나.
▲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웃음) 선배들이 가르쳐준 대로 못 추면 손을 탁 때리고, 잔심부름도 많이 시켰죠. 그래도 어떡해요. 춤이 좋은걸. 고2 때였나, 스크림(1996년 데뷔한 아이돌 그룹) 백댄서로 선 게 첫 무대였어요.
-- 당시 댄서는 처우가 좋지는 않았을 텐데.
▲ 아무래도 그랬죠. 방송국 대기실 바닥에서 자고, 밥 먹을 때가 되면 매니저에게 쭈뼛쭈뼛 카드를 받아야 했어요. '우리가 무대 뒤에서 힘껏 도와주는데 왜 이런 취급을 하지?' 싶었죠. 그래서 야마앤핫칙스를 세울 때 사업자 등록을 했어요. 정시출근 정시퇴근하는 시스템 갖춘 회사를 만들어서 후배들에겐 다른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거든요. 주변에서 초반엔 비웃더라고요. '머리 굵어졌구나' 하는 분위기. 그러나 이제 사업자 등록을 하는 안무팀이 늘고 있어요. 전홍복 대표와 저는 뿌듯하죠.
-- 엠넷 '프로듀스 48', SBS 모비딕 '쎈마이웨이'에선 강렬한 성격이 부각된다. 실제 성격인가.
▲ 일하다 보니 바뀐 것 같아요. 원래 평범했거든요. 방송 댄서 일을 시작했을 땐 기획사 대표님도 매니저들도 주변 모두가 남자였어요. 당시 분위기에선 여자라고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게 있었죠. 저를 보호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똑 부러지게 말하다 보니 성격이 두 개가 됐어요. 일할 때 성격은 '프듀'에 나올 때와 똑같지만, 평소 친구들과 만날 땐 깔깔대고 잘 웃어요.(웃음)
-- 유난히 히트시킨 포인트 안무가 많다. 비결이 있다면.
▲ 공식은 없어요. 사실 좋은 안무는 죽어라 생각하면 오히려 안 나와요. 예전에 가수 선하의 '샨티샨티'에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는 포인트 춤은 연습생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 만지는 걸 보고 착안했고, '시건방춤'은 골반 스트레칭을 하다 만든 거죠. 이 모든 건 전홍복 대표와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남성 팬의 시각을 놓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또 노래는 수천 번 들어봐요. 특정 안무를 쟁여둔 다음 나눠주는 게 아니라, 그 노래를 수없이 듣고 몸에 익혀서 새로 창작하는 거죠.
-- K팝 열풍에 안무의 기여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나.
▲ 50∼60%는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은 음악·안무·가수의 비주얼을 우선 평가하니까요. 다만, 포인트 안무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퍼포먼스 자체가 완결성 있어야지 포인트만 반복하면 유치해 보입니다. 이렇게 요즘 음악업계 트랜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대중은 금방 식상해하고 새로운 걸 원해요. 창작자 입장에선 고통스럽죠.
-- 우리나라 아이돌은 왜 이렇게 춤을 잘 추나.
▲ 슬프지만 스파르타식 교육 때문 아닐까요. 해외 출장을 가보면 어느 나라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요. 아이들이 큰 압박을 이겨내다 보니 웬만한 경쟁에도 무너지지 않는 거죠. 또 다른 이유는, 대중의 까다로운 눈높이 덕분입니다. 대중이 제작자의 시각에서 가수의 노래, 안무, 스타일링에 의견을 내는 게 익숙해졌어요. 그 결과물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청자 투표고요. 거기에 맞춰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는 거예요.
-- 20년 넘게 일하며 슬럼프는 없었나.
▲ 있었죠. 회사 대 회사로 일하다 보면 만들고 싶은 안무만 만들 수 없었어요. 섹시하지 않은 노래인데도 '야한 동작을 넣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죠. 거기에 맞추다 보면 회의감이 들었어요. 또 해당 가수의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땐 안무 탓을 하고, 잘되면 기획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기획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춤이 좋아서 버텼네요.
-- 안무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 탭댄스, 스포츠댄스, 재즈댄스 등 여러 장르를 배워보길 추천해요. 제가 자랄 땐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유튜브에 스트리트 댄서들의 다양한 영상을 볼 때면 부러워요. 저처럼 교복 입고 일본에서 공수해온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보며 춤을 배운 사람과는 다르죠. 요즘 친구들도 기본기를 탄탄하게 익히고, 여러 장르를 접해본다면 시각이 넓어질 거예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즐기면서 하라는 거예요. 사실 힘든 길입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오래 할 수 없어요. 전 대표님, 단장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아직도 오글거려요. 10년만 더 현역으로 뛰면서 언니, 누나로 불리고 싶어요.
clap@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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