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민주화 주장하다 11년형 선고받고 투옥 중 사망
아내 류샤, 8년간 가택연금 처했다가 10일 자유의 몸 돼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2010년 10월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는 그해의 평화상 수상자로 중국의 류샤오보(劉曉波)를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중국의 근본적 인권을 위한 그의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류샤오보는 신중국 건국 이래 타국에 귀화하거나 망명하지 않고 노벨상을 받은 첫 번째 중국인이다.
노벨상위원회의 평가처럼 13일 사망 1주기를 맞는 그의 삶은 중국의 인권 개선과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1955년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나 중문학을 전공한 후 베이징대학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던 류샤오보가 인권 운동에 눈을 뜬 것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때였다.
톈안먼 시위는 중국 정부가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 100만여 명을 무력으로 진압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톈안먼 시위가 발발했을 때 류샤오보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방문 학자로 체류 중이었지만, 즉시 귀국해 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그는 평화적 해결을 위해 시위대의 광장 철수를 주장한 온건파였지만, 이후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삶을 살게 된다.
톈안먼 운동에 가담했던 지도부 대부분이 해외 망명의 길을 택했지만, 류샤오보는 국내에 남아 활동을 계속했고 이후 네 차례나 체포, 구금됐다.
1989년 6월 체포돼 1991년 1월 '반혁명 선전선동죄'를 선고받았다가 처벌 면제 처분을 받았고, 1995년 5월에는 톈안먼 시위의 재평가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벌이다 9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96년 9월에는 중국의 대만 위협 정책을 비판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10.10선언'을 발표했다가 '사회질서 교란죄'로 체포돼 노동교양 3년 처분을 받았다.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신산하게 만든 것은 2008년 12월 세계인권의 날에 '08헌장'을 발표하려다가 발각된 것이었다.
공산당 일당체제 종식 등 광범위한 민주개혁을 요구한 08헌장을 중국 정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고, 2009년 12월 그에게 '국가전복선동죄'를 적용해 징역 11년 형을 선고했다.
랴오닝(遼寧) 성 진저우(錦州) 감옥에 수감 중이던 그에게 2010년 노벨상위원회는 평화상을 수여했지만, 류샤오보는 상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위원회 측은 시상식 때 텅 빈 의자에 메달을 걸어주는 이벤트를 했다.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중국 정부는 격분했고, 이로 인해 그의 아내 류샤(劉霞)마저 아무 죄 없이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다.
긴 옥살이로 인해 심신이 탈진한 류샤오보는 지난해 간암에 걸렸고, 결국 7월 13일 중국 선양(瀋陽)의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 전 그가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부인 류샤가 외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고,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이러한 뜻을 밝혔다.
하지만 류샤는 지난해 7월 15일 남편의 장례식 직후 중국 당국에 의해 윈난(雲南)성 다리(大理) 시로 강제 여행을 가면서 외부와 40여 일간 연락이 두절됐다.
이후 베이징의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해 외출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부닥쳤다. 그는 극심한 슬픔에 빠져 우울증을 겪었으며, 최근에는 몸이 안 좋아 수술까지 받았다.
류샤의 자유를 요구하는 각국 정부와 지식인, 인권단체 등의 요구가 빗발쳤으나, 중국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다가 지난 10월 전격적으로 그의 독일 출국을 허용했다.
이는 미국과 무역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독일 등 서방 국가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홍콩 인권단체는 13일 류샤오보의 기일을 맞아 홍콩 도심에서 추모 집회와 행진을 한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류샤에게 작고한 류샤오보 대신 상을 받으러 노르웨이에 오라고 초청해, 그가 1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노벨평화상을 받을지도 주목된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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