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600여 그루 모두 매몰 처리…3년간 사과농사 못 해 '망연자실'
(원주=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이 지역은 과수 화상병 발병지로서 과원 출입 및 나무의 이동을 제한합니다."
12일 오전 강원 원주시 신림면의 한 사과농장 앞에는 이 같은 경고문이 적힌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렸다.
현수막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농장(과수원)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1만3천여㎡의 땅은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농장 인근의 원두막 그늘에서는 일거리를 잃은 농민들이 모여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한 달만 기다리면 수확인데, 그놈의 화상병이 덮쳐 사과나무를 뿌리째 모두 뽑아 구제역 때처럼 땅속에 다 묻어버렸어"
이 농장은 지난달 29일 과수 화상병 확진 판정을 받고 사과나무 1천600여 그루를 모두 매몰 처리했다. 과수는 가지마다 당구공만 한 사과를 달고 햇살을 머금으며 수확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과수 구제역'으로 불리는 화상병은 사과·배에 주로 피해를 주는 세균성 식물병이다. 병에 걸린 나무는 흑갈색 병반이 나타나면서 잎이 시들고, 줄기가 서서히 마르기 시작해 결국은 검게 변하면서 죽는다.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발생 농장 주변 100m 안에 있는 과수는 뿌리째 캐내 땅에 묻은 뒤 생석회 등으로 덮어 살균해야 한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푸름을 더하던 과수원은 송두리째 파헤쳐져 빈 땅이 됐다. 나무를 묻은 곳은 검은 방수포가 넓게 덮였다.
그곳을 바라보던 농장주 이영희(63)씨가 힘겹게 입을 뗐다.
"이제 딱 10년째야. 10년. 사과농사라는 게 나무 심고 1∼2년 지난다고 되는 게 아니야. 7년은 지나야 먹을 만한 사과가 열려. 10년이면 제일 상품성 좋은 사과가 나올 때였는데…"
이씨는 이곳에서 1만3천여㎡ 규모로 10년째 사과농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부사, 홍옥, 양광 등을 18㎏들이 4천여 상자를 출하했다.
올해도 가지치기, 솎아내기 등 품이 많이 드는 작업들을 다 마치고 수확만 기다리던 터였다.
그는 지난 5월 초 나뭇잎들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새로 나는 잎이 끝에서부터 마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화상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봄 갑자기 추위가 닥쳤기에 냉해라고 여겼다.
증상이 다른 나무들로 점차 번지자 그는 농업기술센터로 신고했고, 지난달 말 화상병 통보를 받았다.
"이번 달 말부터 수확에 들어가야 했는데 당장에 뭘 해야 할지 막막해. 당장에 나무를 심지도 못하게 하고, 3년 뒤부터 할 수 있다는데 이 나이 먹고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정부는 이 병이 발생한 농장에 대해 3년 동안 사과·배·자두 등을 심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다.
농장을 다시 꾸려 상품성 있는 사과를 키워내려면 지금부터 10년의 세월이 필요한데, 이 씨는 70세가 넘어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아직 뚜렷한 보상 계획도 듣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피해액이 최소 5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묻어버린 나무와 수확하지 못한 사과를 모두 더 한 값이다.
여기에 과수 선별기, 고공 작업차 등 농기계와 저온저장고를 마련하는데 든 돈을 계산하면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강원도는 도내 과수 화상병 피해 농가 면적을 5.3㏊로 집계하고 추가 확산방지를 위해 예비비 1억5천만원을 긴급 투입했다.
농가 피해 규모도 조사하고 있다.
10년의 땀과 노력을 화상병에 모두 빼앗긴 이씨의 시름은 묻어버린 사과나무와 함께 깊어져 간다.
"한창 일할 때 그늘에 앉아 한탄만 하고 있으니 막연하고 답답해. 10년의 꿈을 모두 땅속에 묻어버린 거지."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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