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2년간 국가비상사태…무소불위 권력으로 정적 세력 '청소'
제왕적 대통령제 '숙원' 성취…'쿠르드 때리기'로 권력유지 모색할듯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년 전 쿠데타 진압 당일 연설에서 "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꿈에도 그리던 '제왕적 대통령'에 취임했다.
총리 시절인 2007년부터 시도했으나 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에 부닥쳐 9년간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정치적 숙원을 달성한 것이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영역에도 지배력을 확보함으로써 사실상 종신집권의 기반도 마련했다.
본인의 말대로 2년 전 8시간 만에 막을 내린 쿠데타 시도는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신의 선물' 그 자체였다.
◇ 250명 숨지고 8시간 만에 막내려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밤 9시 30분께 쿠데타군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가를 떠난 틈을 이용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국제공항과 보스포루스대교, 수도 앙카라 국제공항, 국영방송사 등 핵심 시설 장악에 나섰다.
그러나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의 저항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기적적인 이스탄불 복귀로 6시간 만에 쿠데타군의 전열은 급격히 허물어졌다. 이튿날 새벽 5시를 넘어서면서 군사정변 시도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 쿠데타군을 막아선 시민과 군경 250명이 목숨을 잃었다.
터키정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쿠데타 기획·모의 주체는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이며, 직접 쿠데타를 지휘한 '수괴'는 4성 장군인 아큰 외즈튀르크 전 공군사령관이다.
대표적인 지한파 터키군 인사로 꼽힌 외즈튀르크는 쿠데타 보름 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쿠데타 후속 조처로 최대 정적 세력 제거
터키공화국 역사에서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공화국 체제, 즉 '케말리즘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한 군은 과거에도 공화국이 위기라고 판단할 때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했다.
군, 사법당국, 학계에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이른바 '귈렌 세력'이 이번 쿠데타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 추종자 다수가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귈렌 본인은 쿠데타 기획·모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귈렌 세력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에르도안 당시 총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나 2012년 권력투쟁을 벌이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돌아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를 기회로 사회 각계에 뿌리내린 귈렌 네트워크 청산에 나섰다. 쿠데타에 직점 가담한 증거가 없더라도 귈렌 지지자라는 이유로 '펫훌라흐주의 테러조직'(FETO)으로 몰려 체포되고 직장에서 해고됐다.
◇ '세계 최대 언론인 감옥'으로
숙청은 귈렌 세력에 그치지 않았다. 제왕적 대통령을 원했던 에르도안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던 학자와 언론인 등이 쿠데타 연루 또는 귈렌 조직 연계 혐의로 무더기 구금됐다.
대표적인 예가 세속주의 진보 언론 줌후리예트 편집국장과 베테랑 기자, 최고경영자(CEO) 등 임직원 17명을 장기간 투옥한 일이다. 이들은 귈렌 조직에 협력한 혐의를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줌후리예트는 귈렌이 에르도안의 정치적 동지인 시절부터 귈렌 네트워크의 위험성을 가장 신랄하게 추적·보도한 매체다.
쿠데타 진압 이후 관련 혐의로 구금된 용의자는 16만명에 이르며(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올해 3월 집계 기준), 그 가운데 7만7천명이 정식으로 구속 기소됐다(터키 내무부 올해 4월 발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집계에 따르면 쿠데타 진압 후 올해 3월까지 군경과 공무원 등 공공부문 종사자 약 16만명이 해고되거나 직위해제됐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언론인이 120명 넘게 투옥됐고, 폐간·방송중단 언론사도 180곳이 넘는다.
여기다 에르도안 대통령 취임선서 전날인 지난 8일 무더기 해고와 폐간을 단행, 해고·직위해제 인원은 약 18만명으로, 폐쇄 언론사는 200곳으로 각각 늘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올해 터키의 언론자유지수를 180개국 가운데 157위로 평가하면서 '세계 최대 언론인 감옥'이라고 묘사했다.
터키정부는 또 귈렌 네트워크 연계 혐의를 둔 기업 975곳의 자산을 압류했는데, 이를 리라화 가치가 급락한 현재 환율 기준으로 환산해도 104억달러(약 12조원)에 해당한다.
◇ "다 이룬 에르도안, 분열정책 유지할 것"
에르도안 대통령이 범죄사실 소명을 거치지 않고 대규모 체포와 해고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국가비상사태이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대통령제 개헌 국민투표와 지난달 조기 대선·총선도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정부의 압도적 물량공세 속에 승리했다. 불공정 선거 시비가 불거지며 논란이 일었지만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영역까지 지배하는 강력한 1인 독주체제를 구축하고 2033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원하던 모든 것을 모두 손에 넣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모든 책임도 떠안게 됐다.
이달 11일 에르도안 대통령 본인도 "이제 나에게도, 차기 대통령에게도 행정의 오작동과 부실에 어떤 변명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치적 위기를 대비해서라도 안팎의 '적'을 상대로 한 싸움을 유지하고 국가주의를 계속 자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서방과 쿠르드족 '때리기'로 승부를 걸어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는 이번에 대선과 함께 실시된 총선에서도 국가주의 성향 '민족주의행동당'(MHP)과 연대한 덕분에 의회 과반을 유지했다.
여론조사 업체 콘다의 베키르 아으르드르 대표는 최근 터키 언론과 인터뷰에서 "터키인은 나라의 분열을 편집증적으로 두려워하는 까닭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쿠르드 정책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르드에 강경대응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tr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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