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은
(팔라완=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586㎞ 떨어진 섬 팔라완. 여전히 문명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섬이다. 필리핀의 7천 107개의 섬 중에서 다섯 번째로 크지만, 다른 섬들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덕에 천혜의 자연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필리핀의 대표 휴양지인 보라카이 섬이 환경오염 문제로 몸살을 앓다 결국 지난 4월 전면 폐쇄됐다. '마지막 지상낙원'으로 불리던 이 섬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궁창'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보라카이 섬이 폐쇄된 지 두 달 만인 지난 6월 23일 팔라완으로 가는 직항로가 열렸다. 이른 아침 준비를 서둘러 오전 8시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딱 점심시간에 팔라완 주도 푸에르토 프린세사의 아담한 공항에 내린다.
비행기를 탄 건 7월 초. 우기가 시작된 데다 태풍 '마리아'의 간접 영향권에 들면서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시도 때도 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부터 양동이로 쏟아붓는 듯한 폭우까지 이어졌다.
사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팔라완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것들
푸에르토 프린세사 시내에서 북쪽으로 70여㎞ 떨어진 지하강 국립공원(Puerto-Princesa Subterranean River National Park)으로 가는 길은 옛 대관령 고갯길을 넘듯 열대우림 속으로 난 산길을 구불구불 따라간다.
웅장한 바위 절벽이 보이면 지하강 국립공원에 거의 다다랐다는 뜻이다. 이 공원은 석회암이 녹아 형성된 거대한 카르스트(Karst) 지형이다. 장엄한 바위 아래로 8.2㎞의 강이 흐른다. 이 강은 곧바로 바다와 합쳐지기 때문에 하류 지역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다.
뿌리가 지면 위로 자라는 맹그로브 숲과 물이 맑은 늪지를 포함해 약 800종의 식물과 233종의 동물이 사는 이 공원은 그야말로 생물 다양성의 보고다. 산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고, 2012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아침이지만 지하강 입구로 가는 선착장은 관광객과 가이드로 북적인다. 하루 입장객을 1천200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성수기라면 서두르는 것이 좋다. 앞 팀의 인원이 많으면 대기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배들도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다.
방카(banka)라고 부르는 길고 좁은 배는 거미처럼 양옆으로 길게 다리를 빼고 긴 대나무를 연결해 균형을 잡는다. 지하강으로 관광객을 데려가는 방카는 8명이 두 줄로 끼어 앉아야 할 만큼 작다.
바다 저편, 지하강으로 가는 입구는 태풍이 뿌리고 지나간 비와 구름, 산안개와 물안개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장엄한 석회 동굴과 지하강
엄청난 모터 소리와 함께 제법 거센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 바위 절벽 안쪽으로 숨은 작은 해변에서 내렸다. 숲 속 오솔길로 들어가니 원숭이 한 마리가 난간에 올라앉아 있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는 않고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카메라만 피했다.
동굴 입구에서 구명조끼와 안전모, 한국어가 설정된 오디오 가이드, 거기에 마스크까지 장착하고 현지 가이드가 노를 젓는 작은 배에 올라탄다. 배를 타기 전부터 오디오 가이드까지 반복해서 듣는 경고는 '위를 바라볼 때 입을 벌리지 말 것'이다. 넋을 놓고 감탄하느라 잠시 방심했다가는 박쥐 배설물을 입으로 받을 수 있다.
배는 지금까지 확인된 지하강 8.2㎞의 구간 중 1㎞ 남짓을 왕복으로 오간다. 동굴의 주인인 박쥐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이 미안하니 조용히 가이드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에 시선을 던진다.
가이드가 '왼쪽' '오른쪽' '위' 하고 알려주며 헤드라이트를 비추면,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여기는 시장입니다"라며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조금이라도 닮은 야채나 과일의 이름을 붙인다. 제법 큰 공간은 대성당이 되고 예수와 마리아, 합창단도 있다.
대지로 스며든 물이 거대한 바위를 녹이고 다시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과 석순, 석주를 빚어내는 그 수천 년의 시간을,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은 알지 못하니 자연의 힘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 앞에서 어린아이들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기는 중이다.
◇ 맹그로브 숲의 반딧불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가 원망스러웠던 건 딱 한 번.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에 불을 켜 놓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 아닌 질문이 나온다는 맹그로브 숲의 반딧불이 투어에 나섰을 때다.
해가 지고 야시장이 열리는 베이워크 공원에서 방카를 타고 만(灣)을 건너 깜깜한 맹그로브 숲 사이로 난 이와힉강을 따라 올라간다.
맑은 날이라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힌 듯한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지만, 이날은 맹그로브 나무의 반딧불이도, 하늘에서 쏟아질 듯한 별도, 물속에서 빛나는 플랑크톤도 영 모습을 드러내 주질 않았다.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또 비가 흩뿌렸다.
운이 좋아 맑은 날 반딧불이를 만난다면 부디 사진 욕심은 버리시길.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도, 어떤 뛰어난 사진작가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반딧불이가 만드는 장관을 오롯이 담아낼 재간은 없으니.
◇ 물놀이 최고의 간식 '바나나'
태평양의 섬나라 필리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아일랜드 호핑 투어다. 방카를 타고 3∼4개의 섬을 돌며 해수욕이나 스노클링 등 물놀이를 여한 없이 즐기는 시간이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는 가까운 혼다 베이(Honda bay)로 나간다.
물과 친하지 않더라도 즐길 거리는 많다. 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모래사장과 옥빛 바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말 그대로 그림처럼 펼쳐지니, 그 그림을 사진으로 담으면 된다.
역시나 흐린 날이 이어져 쨍한 햇볕의 도움이 필요한 '그림 같은 사진'을 얻지는 못했지만, 화상 걱정 없이 마음껏 놀 수 있으니 위로로 삼을 만하다. 한국에서 최대 50인 자외선차단제의 SPF 지수가 필리핀에서는 250에 달한다니, 그 무섭도록 강렬한 태양을 가려준 비구름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
코우리(Cowrie) 섬의 바닥이 비치는 맑고 얕은 바닷물은 따뜻해서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이 안전하게 즐기기에 딱 좋다. 야자나무 아래서 야자 열매에 빨대를 꽂아 꼴딱꼴딱 마신 다음 뽀얀 과육까지 싹싹 긁어먹는 건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산호가 아름답다는 곳에 부교를 띄워놓은 팜바토 리프(Pambato Reef)에서 스노클링을 즐기고 나서 식당이 있는 룰리(Luli) 섬에 내렸다.
바비큐도 바비큐지만, 해산물 넣고 끓인 라면을 먹는 동안 다들 말이 없어지고 '후루룩∼' '으어∼' 소리가 채워진다. 꼬치에 끼워 굽거나 튀겨 먹는 바나나는 달콤한 것이 졸깃한 씹는 맛에 든든하기까지 하니 물놀이 최고의 간식이다.
◇ 지프니 & 트라이시클
푸에르토 프린세사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이다. 지프니는 버스, 트라이시클은 택시 역할을 하는 서민의 교통수단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깡통차'라고도 부르는 지프니는 미군에서 흘러나온 지프의 엔진을 가져다가 수레에 달고, 뒤로는 성당에서 흔히 보는 긴 의자를 나란히 단 것이 시초다.
낡을 대로 낡은 지프니부터 운전사 취향대로 꾸민 화려한 지프니까지 각양각색이다. 지프니는 승차 정원도 없고, 정류장도 없다. 타고 싶은 곳에서 손을 들어 차를 세우면 탈 수 있고, 요금은 옆 사람에게 건넨다.
같은 요금을 내고 훨씬 편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거스름돈을 내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라고 한다. 차 지붕 아래 머리만 넣지 않으면 공짜라 차에 매달려 가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토바이 옆에 좌석을 단 트라이시클은 관광객들도 많이 이용한다. 1∼2인용으로 보이지만, 4∼5명 이상도 너끈히 탄다.
◇ 팔라완 가는 길
필리핀항공은 지난 6월 23일부터 인천에서 팔라완의 주도인 푸에르토 프린세사로 매일 직항 항공편을 운항하고 있다. A321 기종(비즈니스 12석, 이코노미 플러스 18석, 이코노미 169석)으로, 4시간 40분 정도면 도착한다. 인천에서 오전 8시 25분 출발해 당일 오후 12시 5분 도착하고, 귀국편은 오전 12시 50분 출발, 오전 6시 30분 도착하는 스케줄이다. 7월 26일부터는 부산에서도 주 4회 운항한다.
◇ 푸에르토 프린세사 시내에서 둘러볼 만한 곳
▲ 이와힉 교도소(Iwahig Prison and Penal Farm)
팔라완 섬의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죄수들의 유배지였다. 교도소 시설이 만들어진 건 1904년 미군에 의해서다. 언뜻 보면 한가로운 교외의 농장과 다름없다.
소들이 풀을 뜯고, 농구장이 있고, 기념품점에서 개와 고양이가 늘어져 낮잠을 자는 이곳이 교도소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WELCOME(환영)' 간판이 걸린 입구를 들어가고 나갈 때 총을 든 경비가 버스에 올라 쓱 둘러볼 때뿐이다.
이곳에 수감된 죄수는 모두 모범 무기수다. 죄수복인 티셔츠 색깔로 죄의 경중을 구분한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아 생활한다.
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음식을 외부에서 들여와 먹을 수 있으며 가족이 들어와 함께 생활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인 관광객이 오면 한국 가요에 맞춰 커버댄스를 선보인다.
▲ 팔라완 야생동물 구조 & 보호센터(Palawan Wildlife Rescue & Conservation Center)
남획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악어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을 사육한다. 비교적 작은 민물 악어는 수조에 있고, 큰 해수 악어는 콘크리트 탱크 위에 설치된 다리를 지나며 볼 수 있다. 빈투롱 등 팔라완 섬의 고유 동물도 볼 수 있다.
▲ 나비 정원과 원주민 마을(Palawan Butterfly Eco-Garden and Tribal Village)
작은 정원을 꽃과 식물로 꾸미고 다양한 나비를 풀어놓았다. 그 수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고 한다. 안쪽에서는 팔라완 원주민 가옥을 재현해 놓고 전통 악기와 사냥법 등을 보여준다.
▲ 베이커스 힐(Baker's Hill)
빵집에서 시작했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주인 부부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는 놀이터와 정원, 산책로와 전망대, 식당과 카페, 기념품점을 갖추고 다양한 조형물과 캐릭터 피규어가 가득한 작은 테마파크의 모양새를 갖췄다.
▲ 미트라 전망대(Mitra's Ranch)
하원의장 등을 지낸 팔라완 출신의 정치인 라몬 미트라 가족의 개인 별장. 말이 풀을 뜯는 언덕과 초원이 싱그럽게 펼쳐진다. 맑은 날에는 아랫마을 넘어 혼다베이까지 보인다.
◇ 묵을 만한 숙소
▲ 베스트웨스턴 플러스 아이비월 호텔(Best Western plus The Ivywall Hotel)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 중 하나.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저녁 시간에는 야외에 있는 식당 마당에서 조촐한 민속춤 공연이 열린다. 공연이 열린다.
▲ 휴 호텔(Hue hotel)
2017년 문을 연 최신 호텔로 깔끔하고 모던한 시설을 자랑한다. 공항에서 차로 15분 거리. 종합쇼핑몰인 로빈슨몰이 바로 옆이다.
▲ 쉐리단 비치 리조트 & 스파(Sheridan beach Resort & Spa)
지하강 투어를 하는 데 최적의 숙소다. 시내에서 지하강 국립공원까지 2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쉐리단에서 지하강 투어를 시작하는 선착장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리조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수영장은 물론, 사방 비치(Sabang Beach)를 끼고 있어 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라 할 만하다.
[취재협조] 필리핀항공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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