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문화재단 주최 개인전 '세월오월과 촛불' 8월 19일까지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사실 이쪽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박근혜 저 잘난 여자, 아니 못난 여자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중요한 건 저쪽이죠."
홍성담(63) 작가가 가리킨 곳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얼굴을 한 허수아비가 그려져 있었다. 길이 12.6m에 이르는 그림에서 그 부분만 비닐이 너풀대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2014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 제외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가, 국정농단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속에서 광주시립미술관에 다시 설치된 걸개그림 '세월오월' 원작이다.
곡절 많은 그림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복판에 내걸렸다. 가나문화재단 주최로 20일부터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홍성담 개인전 '세월오월과 촛불'을 통해서다.
작가는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세월오월'을 지칭하며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최고 상업화랑(가나아트센터)에서 이 정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면서 "민중미술, 리얼리즘 미술 저변을 넓힌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밝혔다.
"이제야 밝히는데 '세월오월'은 윤범모 당시 특별전 책임 큐레이터와 비밀리에 많이 의논하며 그렸어요. 윤 큐레이터가 마지막에 박근혜 얼굴을 닭대가리로 고쳐주면 책임지고 전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위에 그리고 나면 복원할 수 없으니 (닭을 그려) 양면테이프로 붙였는데 전시를 못 하게 됐죠. 그런데 양면테이프가 유착되면서 벗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놔뒀어요."
허수아비에 비닐이 너풀대는 까닭이다.
특별전이 무산되던 당시를 회고하던 작가는 다소 울분에 찬 목소리로 "진실은 감춰질 수 없고, 주머니 속 송곳은 얼마든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작가는 대신 그림 오른쪽을 주목해 달라면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추진되면서 위안부를 비롯한 한일 과거사를 덮고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생각에 위안부 할머니와 일본 자위대를 대립적으로 배치해 그 부분이 드러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세월호(지하 1층), 촛불집회(1층), 일본군 위안부(2층), 박정희 정권(3층) 등 주제별로 60여 점의 근작을 소개한다. 국경을 넘어 갖가지 형태의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그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미래에 희망을 전하겠다는 것이 큰 주제다.
이미지는 명확하고 메시지는 선명하다. 머리에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낸 '바리깡' 연작은 개발독재 정권의 폭력을 증거한다. 흑백의 '제주 4·3고'는 하얀 끈으로 연결된 남녀가 일종의 씻김굿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최신작 '통일대원도'는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회동'을 아래에 배치하고, 정상 주변에 모여들었다는 새 14마리와 가무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진 모습을 주변에 둘렀다.
다만 일본군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 등은 직설적이다 못해 일부 관람객에게는 폭력적으로 다가올 여지가 있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우리 역사의 그늘을 판화, 걸개그림 등에 줄기차게 담아오면서 민중미술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아버지를 상징하는 듯한 아이를 출산한 그림 '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2012), '세월오월'(2014) 등이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비판과 지지를 한몸에 받아왔다.
작가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한창 작업 중이라면서 "문재인 정부 기간에 꼭 다뤄서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겠다"고 밝혔다.
"우리가 타인에게 저지른 잔인한 학살의 과거를 스스로 성찰하는 모습을 동아시아에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도덕적, 윤리적 승리 아닙니까. 우리 뼈에 새겨진 계엄령이라는 DNA가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세월오월과 촛불' 전시는 8월 19일까지. 문의 ☎ 02-736-1020.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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