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모 교수, 학술지 '한국문화'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규장전운)은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편찬을 명해 이덕무, 윤행임, 서영보, 남공철, 이서구, 이가환 등 많은 규장각 문신이 참여해 1796년 간행한 운서(韻書)다.
운서는 한시(漢詩)를 지을 때 참고하려고 만든 발음자전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유통된 운서가 바로 규장전운이다. 정조는 각종 시험에서 압운(押韻·운을 규칙적으로 다는 일)은 반드시 규장전운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지시할 정도로 이 책에 애착을 드러냈다.
그동안 규장전운 편찬 동기와 배경으로는 정조가 보인 음운학에 관한 관심이 주로 거론됐으나,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보면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느낀 감정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선모 중국 난징(南京)대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한국문화'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규장전운 편찬배경고(編纂背景考)'에서 정조와 홍계희(1703∼1771)의 관계를 중심으로 규장전운 편찬 과정을 분석했다.
정 교수가 홍계희라는 인물을 주목한 이유는 그가 영조 27년(1751) 운서 '삼운성휘'(三韻聲彙)를 지었기 때문이다. 삼운성휘는 당시 영의정 김재로가 서문을 쓰고 병조판서 홍계희가 책임 편집한 관찬(官撰) 운서다.
게다가 안정복이 쓴 문집에는 정조가 세손이던 1772년 삼운성휘 서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서문은 전하지 않지만, 정조가 삼운성휘를 열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를 보면 정조는 삼운성휘가 있음에도 즉위 직후 서명응에게 운서를 발간하라고 재촉했다.
정 교수는 "서명응은 1779년 규장운서(奎章韻書)를 제작해 바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간행되지 못했다"며 "이후 정조는 운서를 이야기할 때 삼운성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정조는 규장전운이 나오기 전까지 관이 편찬한 삼운성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중인 출신 박성원(1697∼1767)이 지은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를 중시했다.
정 교수는 "삼운성휘는 간행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이용했고, 검색이 편리하다는 호평을 받았다"며 "일찍이 운서에 관심이 많아 삼운성휘 서문까지 쓴 정조가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규장전운은 사성(四聲)에 소속된 글자를 한글 자모 순에 따라 배열했는데, 이는 삼운성휘와 동일한 방식"이라며 "정조는 화동정음통석운고에 대해 모순된 평가를 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화동정음통석운고보다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삼운성휘를 정조가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홍계희가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 교수 생각이다.
정 교수는 "홍계희는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 아버지인 김한구, 영의정 김상로 등과 결탁해 사도세자의 잘못을 고변케 해 사도세자가 죽음에 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정조는 즉위 전후에 이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1777년 홍계희의 두 손자가 정조를 시해하려는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일가가 처형당했고, 홍계희의 관작은 추탈돼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며 "이를 계기로 홍계희에 대한 성토와 관련 인물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규장전운 편찬을 주도한 이덕무도 정조의 의중을 파악해 '규장전운범례'(奎章全韻凡例)에서 홍계희와 삼운성휘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면서 "정조는 부친 죽음에 깊이 관여한 홍계희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삭제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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