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떠난 캠프그리브스,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꾸는 'DMZ평화정거장'
김명범·박찬경·정문경 등 조각·설치·영상 선보여
(파주=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5년 가까이 제 역할을 찾지 못한 도르래는 잔뜩 녹이 슬었다. 마찬가지로 녹슨 쇠사슬을 한참 당기고서야, 무성한 수풀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탄약고가 조금씩 입을 벌렸다. 탄약 더미 대신 난데없이 나타난 미끄럼틀과 그네가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2km 떨어진 캠프그리브스에는 1953년부터 반세기 넘게 미군이 머물렀다. 2004년 미군 철수 후 버려지다시피 한 이곳은 안보관광지로 부상 중이다. 2016년 방영된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라는 점도 연간 3만여 명이 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요즘 캠프그리브스에서는 안보관광을 넘어 문화예술까지 품으려는 'DMZ 평화정거장 사업'이 한창 중이다. 핵심 프로그램인 예술창작전시는 "캠프그리브스가 품은 역사성을 살리면서 (그 상흔을) 문화예술로 중화하려는"(이은경 DMZ 평화정거장 예술총감독) 노력이다.
8일 찾은 캠프그리브스에서는 탄약고와 볼링장, 반원형 퀀셋 막사 등을 활용해 DMZ 역사적, 공간적 특수성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탄약고 두 곳에는 김명범 '플레이그라운드' 연작이 설치됐다. 군사 긴장을 상징하는 탄약고는 미끄럼틀과 사슴이 있는 놀이터 혹은 동물원으로 변했다. 작가가 아파트 철거 현장 등지에서 수집한 미끄럼틀은 남과 북 방향으로만 내려가게 돼 있어 최근 한반도 상황과 연결지어 보게 된다.
사슴 작품 앞에서 만난 작가는 "이곳은 우리에게 실체적으로 다가올 수 없는 초현실적인 공간인데 사슴뿔에 나뭇가지를 연결한 제 작품의 초현실적인 면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라면서 "사슴의 비폭력적인 상징성도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지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 박찬경 영상작품 '소년병'은 DMZ 내 미군 막사라는 공간에서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가상의 북한 소년병이 숲을 배회하며 책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는 서정적인 영상은 머릿속 북한 이미지를 뒤흔든다.
옛 미군 하사관 숙소(스튜디오BEQ)에 설치된 정문경 '쉐이즈 오브 쉐도우'도 소년병을 주인공으로 한다.
완전히 고장난 낡은 소년병 인형은 함께 상영되는 영상 덕분에 다시 작동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부활한 소년병 인형처럼 본래 장소성을 상실한 캠프그리브스는 문화예술 공간이라는 새로운 장소성을 획득했다."
철조망 주변 산책로를 대인지뢰를 미리 파악한다는 발목보호 검독수리, 꽃봉오리를 북쪽으로 향하는 북향 금강초롱꽃 등 가상 동식물로 채운 강현아 '기이한 DMZ 생태누리공원'을 걷다 보면 웃음과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된다.
유리 총을 통해 전쟁의 공허함을 표현한 정보경 '탕탕탕탕탕', 관람객이 지뢰 찾기 게임에 참여하는 시리얼타임즈 '117kb', 이념과 잊음을 연결한 인세인박 네온조각 'ISM! ISM! ISM!' 등 다른 작품들도 시선을 잡아끈다.
예술창작전은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함께 준비한 프로젝트다.
작품 대다수는 캠프그리브스에 반영구로 설치된다. 정비고와 스튜디오 BEQ에서는 오픈스튜디오, 아티스트 워크숍 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함께 열린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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