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조사에서 드러난 경찰 지침…'불법행위에 선제 대응' 미명 속 시위통제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고(故) 백남기 농민에게 물대포를 쏜 것은 과잉진압이었다는 조사 결과를 두고, 경찰이 '불법예방'을 명분으로 집회를 관리·통제하려 계획한 것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21일 발표한 '백남기 사망 사건 진상조사 심사결과'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시위를 관리하는 지침으로 2010년 '합법촉진 불법필벌'을 도입했다가 2013년 '준법보호 불법예방'으로 전환했다.
이는 단순한 표현 방식 차이로 보기 어렵다는 게 진상조사위의 판단이다.
불법예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불법행위가 발생하기 전에 공권력을 먼저 집행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겠다는 것으로, 집회·시위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관리·통제하려는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뜻이라고 진상조사위는 설명한다.
불법예방 지침은 실제 현장에서 적용됐다. 경찰은 집회·시위를 금지·제한하거나 불법행위를 한 집회·시위 참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집회·시위 검거를 많이 한 경찰관은 특진평가 때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백씨가 참가한 민중총궐기는 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단체들이 대거 참여했고, 당시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관계 부처 장관들이 나서 '엄정 대응' 방침을 거듭 밝힌 상태였다.
이에 발맞춰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전국 경찰서에서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기 위해 사전점검을 지시했고, 차벽 설치를 위한 사전준비도 지시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3차례 사전 검토회의를 거쳐 계획을 마련했다.
당시 서울청이 만든 계획서는 정부 비판 세력 10만 명이 광화문에 집결해 청와대로 진격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경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청와대 방향 진출을 막기 위해 이동을 통제하고 차벽을 설치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진상조사위는 이 작전을 언급하며 "경찰 지휘부가 수립한 경비 대책은 민중총궐기를 치안상 비상사태로 인식시키고 있다. 집회 현장의 경찰관들에게 청와대 중심의 차단선 방어에 대한 압박감을 고조시킨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선제적으로 불법을 예방한다는 미명 하에 집회·시위를 통제 대상으로만 여겼던 경찰 지휘부가 과도할 정도의 고강도 경비 대책을 수립하고 집회를 관리한 끝에 과잉진압 사태가 빚어졌다는 지적으로 풀이된다.
진상조사위는 이런 통제 일변도의 지침이 바뀌지 않는 한 과잉진압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2005년 11월 15일 서울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열린 '쌀 비준 반대' 시위를 진압하다가 농민 전용철·홍덕표씨가 중상을 입은 끝에 결국 숨진 사건을 겪고도 다시 백씨의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집회·시위 관리 지침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고수하면 앞으로도 이번 사건 같은 인명 피해가 벌어질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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