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메스를 잡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외과 수술에 마취가 도입되는 데 대영제국을 건설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7세기 '태양왕'으로 불린 프랑스 왕 루이 14세(1638~1715)가 떠들썩하게 치루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거의 없을 듯하다.
네덜란드 현직 외과의사가 펴낸 '메스를 잡다'(을유문화사 펴냄)는 우리가 읽은 역사책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단편들을 그들이 겪은 각종 질병과 치료 과정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저자는 암스테르담 슬로테르바르트 종합병원 복강경 수술 전문의 아르놀트 판 더 라르.
빅토리아 여왕은 사촌인 작센 코부르크·고타 왕가 앨버트 왕자와 결혼해 일곱 명의 자녀를 낳고도 매번 출산의 고통을 못 견뎌 했다.
1853년 빅토리아 여왕이 다시 임신하고 히스테리를 부리자 아마추어 마취 의사가 호출됐다. 당시는 미국 보스턴에서 목의 종양 제거 수술에 에테르를 이용한 전신마취가 처음 도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부분 마취로 통증을 줄여 순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클로로포름 사용은 프랑스 등지에서 '여왕의 마취'로 불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는 마취 수술이 정착되고 마취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환자를 붙잡고 신속하게 수술을 마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오랜 수술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686년 초 갑자기 생긴 치루로 고통받던 루이 14세는 그해 말 베르사유 궁전에서 아내와 아들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리의 손을 붙잡은 채 항문 수술을 받았다.
개인용 좌식 변기에 앉아 대변을 보며 찾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참모 조언을 듣기도 했던 루이 14세는 공개적인 항문 수술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술을 집도한 외과 의사는 75명 일반 환자를 대상으로 연습하고서 왕의 수술에 임했다고 한다.
성공적으로 끝난 이 수술은 '위대한 수술'로 불렸다. 수술에 임한 왕의 용감함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바지 위에다 붕대를 맨 차림을 따라 하는 일이 궁전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책은 이 밖에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인 역사 뒷얘기들을 다루면서 외과 수술의 궤적을 추적한다.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뇌 일부가 사라진 상태로 수술실에 도착한 존 F.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의사들의 긴박했던 수술 현장, 포피에 생긴 문제 때문에 7년 넘게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지 못한 루이 16세, 특이한 병과 사인으로는 경쟁 상대가 없는 교황들의 연대기,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은 뒤 의문의 연쇄적인 뇌졸중 끝에 사망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 레닌 등등.
이들 얘기는 역사 자료와 인터뷰, 언론 보도 내용, 전기, 인물에 관한 기록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에 현역 외과의인 저자의 전문지식과 경험, 유머 등이 더해져 한층 흥미를 더한다.
제효영 옮김. 488쪽. 1만9천800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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