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리당략 얽히지 않은 독자노선에 뚜렷한 개성 발휘…초당파적 존경
명예·국가안보 중시했던 불굴의 정치인…투병 중에도 의정활동 '투혼'
한국 자주 찾은 대표적 '지한파'…상원 군사위원장 지내며 북핵문제에 관심
트럼프 비판에 "장례식 오는 것 원치 않아"…미국의 '보수가치' 줄곧 강조
(뉴욕·서울=연합뉴스) 이준서 특파원 임주영 기자 = 미국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큰 별'이 졌다.
지난해 7월 말기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해온 존 매케인(공화·애리조나) 상원의원은 25일 오후 애리조나 주 히든 밸리에 있는 자택에서 부인과 딸 등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매케인은 1936년 8월 미국령 파나마 운하를 지키는 코코솔로 해군기지에서 출생했다. 스코틀랜드계와 아일랜드계의 조상을 뒀으며 아버지 존 잭 매케인과 할아버지 존 슬루 매케인은 모두 해군 제독으로 항공모함 전략을 세운 선구자로 꼽히는 전형적 군인 집안 출신이다.
그 역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됐으며 베트남전에 자원해 참전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북부 베트남에서 폭격 임무를 띠고 출격했던 자신의 전투기가 격추당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 5년 이상 비참한 포로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해군 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가 '아들을 풀어주겠다'는 월맹군의 제안을 거절한 채 아들이 잡혀 있던 하노이 폭격을 명령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부친이 사령관이 된 뒤 월맹군이 전쟁 성과를 과시하고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매케인의 조기 석방을 제안했지만, 매케인은 본인보다 먼저 붙잡힌 전쟁포로가 모두 석방될 때까지 풀려날 수 없다면서 석방 제안을 거절했다.
미국의 대표적 '베트남 전쟁영웅'으로 꼽히는 매케인 의원은 1981년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으며 그해 현 부인인 신디 여사와 재혼했다. 그가 포로생활 당시 입은 심각한 부상을 제때 적절히 치료받지 못해 양팔을 머리 위로 완전히 들어 올리기 어렵게 되는 등 후유증을 갖게 된 것 등 여러 요인이 전역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어 그는 1982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재선했고, 1986년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내리 6선을 지냈다. 그는 적극적인 성격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계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내면서 한반도 문제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방예산의 근거가 되는 '매케인 국방수권법'은 그의 정치적 무게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예를 중시했던 매케인 의원은 군 복무와 의정 활동을 통해 국가에 기여해온 사실에 긍지를 느껴왔다. 그는 CBS '60분'(60 Minutes) 인터뷰에서 자신이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교훈(校訓)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장차 대중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내가 한 건 국가 방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라는 간명하고 확실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1999년에는 '내 아버지들의 믿음'(Faith of My Fathers)이라는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베트남 전쟁 포로 경험이 자신의 정치 경력에 도움을 줬다고 인정하면서도 남은 인생의 진전에 있어 포로 경험이 방해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평소 끊임없는 '향상 의지'와 노력 정신, 불굴의 신념을 자주 표현해왔다.
매케인 의원은 대표적인 '지한파' 의원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답게 평소 주한미군과 남북관계, 북한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 정치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는 1989년 한국을 방문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며 1991년에도 방한했다. 2013년에 다시 한국을 찾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했다.
2013년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일본, 미국이 서로 힘을 합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선 대북 제재·압박을 강조하면서도 6자회담 재개 등을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했을 때 백악관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에서 매케인 의원과 단독으로 만나 북핵·주한미군 방위비·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등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매케인 의원이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작년 7월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쾌유를 기원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매케인 의원은 이처럼 다양한 이력과 경험을 쌓았지만 필생의 목표였던 대권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패배하면서 정치인생의 재기가 불가능한 듯했던 매케인은 2004년 '부시의 재선'을 위해 뛰었다. 절치부심 끝에 2008년 공화당의 대권행 '본선 티켓'을 잡았지만 결국 오바마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는 뚜렷한 개성을 발휘한 매케인에겐 '매버릭'(Maverick)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고집 센 괴팍한 이단아라는 의미도 담겼다. 매케인의 거칠고 돌발적인 입담도 항상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초당파적 존경을 받았던 드문 정치인으로 꼽힌다.
공화당 내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꼽혔다. 매케인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5년 당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여러 차례 설전을 주고받았다.
그는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미국의 가치를 못 지킨 인물"이라고 일갈하는 등 투병 와중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장례식에 트럼프 대통령이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7월 '오바마케어 폐지 법안'엔 제동을 걸었다. 왼쪽 눈썹 위에 혈전을 제거한 수술 자국이 선명한 매케인은 상원 회의장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가 치켜세웠던 엄지손가락을 떨어뜨렸고, 의원석에선 박수가 나왔다. 법안은 1표 차이로 부결됐다. 여든 살 노장(老將)의 반대표(Thumbs-Down)는 미 의회 사의 인상적 장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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