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원의 헬스노트] 봉침 사망에 되살아난 '선한 사마리아인' 딜레마

입력 2018-08-29 17:59  

[김길원의 헬스노트] 봉침 사망에 되살아난 '선한 사마리아인' 딜레마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2018년 5월 15일. 허리에 통증이 있었던 초등학교 교사 A(38·여)씨가 경기도 부천의 모 한의원에서 봉침(봉독주사)을 맞은 날이다. 하지만 이날이 그녀에게는 사실상 생애 마지막 날이 됐다. 봉침을 맞은 후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쇼크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사경을 헤매던 그녀는 봉침 주사 22일만인 6월 6일에 끝내 숨졌다.
사고 한 달여가 흐른 지난 7월 유가족은 사고를 낸 해당 한의사를 상대로 9억원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A씨가 사고 없이 정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을 때의 합산 소득 등을 고려한 금액이다.
그런데 유족 측이 제기한 이번 손해배상 소송에는 사고가 난 한의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가정의학과의원의 원장도 포함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경찰과 의료계, 유가족 담당 변호사 등의 얘기를 종합하면 사고 당일 한의사는 봉침 시술 후 A씨의 상태가 나빠지자,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에게 직접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이 의사는 A씨에게 항알레르기 응급치료제인 에피네프린을 투여하고 심폐소생술을 하는 등 응급처치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은 나름 의사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골든타임' 내에서 치료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유족과 의료계의 입장이 다르다.
유족 측은 사고 당시 A씨가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보이자 한의사가 곧바로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골든타임으로 볼 수 있는 4분 이내에 에피네프린을 투여하지 못하면서 사고를 막지 못했다고 말한다.
유족 측 신현호 변호사는 "당시 사고 현장을 보여주는 CCTV 영상을 보면 한의사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이 에피네프린을 들고 가는 게 늦어지면서 환자가 쓰러진 지 5분이 넘어서야 약물이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법률로 의사에게 주어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직접적인 불법 행위자가 아니더라도 의사가 이런 사건에서 법률상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직업 독점성을 포기해야 한다"면서 "어느날 갑자기 딸을 잃고 매일 눈물로 지새우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의사 측 입장을 대변하는 대한의사협회는 생명구조라는 선의의 목적으로 한 의료활동에 대해 과실 여부를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사건 당시 해당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이 어찌 됐든 응급구조를 위한 의료활동에 나선 만큼 고의가 없는 경우 그 책임을 면제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사실 현행 법률에서 보면 이런 응급상황에서 의료인의 책임에 대한 규정이 모호하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서는 모든 국민이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갖고, 응급의료를 위한 협조요청이 오면 누구든지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고 있다. 또 응급상황에서의 국민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응급의료법에 의한 면책은 응급의료행위에 대한 완전한 면책이 아닌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에만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받도록 하는 정도다.
응급의료가 필요한 상황은 불특정한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발생할 수 있고 누구나 응급 구조활동을 펼쳐야 할 상황이 전제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리가 적용됨으로써 법적 책임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의사협회 관계자는 "선의로 행해진 응급의료행위에 대해 '중대한 과실'을 이유로 민형사 소송이 부당하게 제기될 우려가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선의의 응급의료행위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다"면서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게 올바른 정의인지 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도덕의 영역인지, 법의 영역인지는 늘 논란거리였다. 결국, 이번 A씨 사망 사건도 이런 논란에서 비켜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선량한 마음'에서 위험에 빠진 이웃을 돕는 사람은 반드시 법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할 때 우리 주위에 선한 사마리아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이제 더는 우리 사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딜레마'가 없도록 머리를 맞대야할 때다.
bi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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