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신라학 학술대회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사에서 6세기는 전환점이었다.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율령을 반포해 법제를 갖췄다.
아울러 6세기는 비석의 시대이기도 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를 비롯해 울진 봉평리 신라비, 단양 적성비, 진흥왕 순수비, 남산 신성비가 모두 6세기 유물이다.
당대 신라인이 3단계 분업 체제로 비석을 제작했고, 공정이 점차 간소화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진흥왕 순수비 연구자인 노용필 한국사학연구소장은 국립경주박물관이 31일 '신라 석비'를 주제로 여는 신라학 학술대회에서 글씨를 쓰는 서사(書寫), 글씨를 새기는 각석(刻石), 비석을 세우는 입비(立碑) 전문가가 각각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30일 배포된 발표문에 따르면 노 소장은 "울진 거벌모라비에 나오는 절서인(節書人), 각인(刻人), 입석비인(立石碑人)은 서사, 각석, 입비를 추진하면서 그 소임의 분장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입비의 소임 분장 체계가 단양 적성비에서는 서인(書人), 석서립인(石書立人)이라는 2단계 체계로 간소화했다"고 덧붙였다.
하시모토 시게루(橋本繁) 일본 니혼죠시대(日本女子大) 교수는 남산 신성비 9개를 분석해 신라인들도 줄임말을 썼다고 발표한다.
하시모토 교수는 군의 윗사람을 의미하는 '군중상인'(郡中上人)을 신라인들이 '군상'(郡上) 혹은 '군상인'(郡上人)으로 바꿔 쓰기도 했다면서 "제1비에 등장하는 '군상촌주'(郡上村主)는 군중상인과 동의어가 아니라 군중상인의 촌주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세중자삼백구십팔'(世中子三百九十八)에서 자(子)를 자(字)로 보아 "세상에 (공표한) 글자 398"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연구사는 "398은 인원수가 아니라 비석 글자 수"라며 "비문에 추가로 글씨를 새기지 못하도록 글자 수를 명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신석열 부경대 교수, 양자량 한국역사연구회 총무, 이성호 동국대 강사가 주제 발표를 한다. 이어 이영호 경북대 교수를 좌장으로 종합 토론을 벌인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