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미술가의 녹슨 구리거울은 무엇을 비추나

입력 2018-09-03 06:00  

흑인 미술가의 녹슨 구리거울은 무엇을 비추나
리만머핀서울, 자메이카 출신 미국 작가 나리워드 소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녹슨 구리 원반이 전시장에 내걸렸다. 붉은 구리와 푸른 녹이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원반의 가슴팍에 난 수십 개 구멍이다. 다이아몬드 형태로 밀집한 31개 구멍 주변을 반짝이는 구리 못이 빼곡히 둘러쌌다.
"이 형태는 콩고 우주론을 패턴화한 것으로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생의 주기를 표현하는 기호입니다. 종교적, 전통적 상징이죠."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서 만난 미국 미술가 나리 워드(55)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의미를 설명했다.
구멍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미국 조지아의 유서 깊은 교회를 찾은 작가는 건물 바닥에서 이러한 패턴의 구멍들을 발견했다. 오래전 이곳은 탈출을 꿈꾸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은신처였다.
숨어지내던 노예들이 조금씩 숨을 뱉어내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도운 '숨구멍'은 자메이카 출신으로 미국 할렘 지역에서 자란 작가의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었다. 원반 작품 '커렉셔널 서클 1280'(2018) 위 녹슨 흔적들도 노예들을 옥좼을 수갑, 그럼에도 탈출을 위해 맹렬히 달렸을 노예들의 맨발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나리 워드는 이처럼 인종, 종교, 계급, 정체성 등을 파고드는 작업에 매진하는 중이다. 지난달 28일 리만머핀 서울에서 개막한 '커렉셔널'은 나리 워드 작업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다.
헌 운동화 끈 수십 가닥을 벽에다 늘어놓은 '노트 엔딩스', 망가진 칠판의 표면 균열을 금으로 채워 넣은 '멘딩 보드' 연작, 옛 금전등록기를 활용한 '샤프' 등 버려진 물건들을 활용해 사회·정치를 비평한 작업이 많다.
작가는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한 사물들의 예상치를 뒤엎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것이 제 작업 철학"이라면서 "작품마다 서로 다른 소재나 사물을 사용해도 동일하게 인간 신체를 설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커렉셔널' 전시는 10월 20일까지. 이번 전시는 리만머핀 서울이 지난해 개관한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정식 전시다. ☎ 02-725-0094.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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