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인 부락 형성…동해안 최초 방파제 건설
공업화 시대 조선업의 메카, 전국 각지 근로자 모여든 곳
(울산=연합뉴스) 김근주 기자 = 울산 방어진은 정말 생선 방어가 많이 잡혀서 방어진일까. 한반도 동쪽 끝 모퉁이에 있어서 방어진일까.
조선 시대 역사 기록을 보면 실제 생선 방어가 많이 잡혔던 것으로 유추된다.
현재 방어진은 한자로 '方魚津'이라고 표기하는데, 위치가 울산 육지의 끝쪽에 있어 모퉁이(方)에 있어 이렇게 정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방어진은 지명 유래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 시대 삼포개항 중 하나인 염포를 포함한 곳이기도 하며, 국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근대 울산 최대의 어항으로 장생포와 더불어 고래잡이를 했고, 현대에는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메카로 성장해 전국 각지에서 근로자들이 모여들었다.
◇ 방어진은 말 목장이 있던 곳
방어진이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공식문서 속 목장의 명칭을 통해 본격 확인된다. 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 1471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속에 '방어진 목장'이 등장하며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방어진이 나온다.
목장에는 360마리의 말을 길렀지만, 조선 말기에 폐지됐다.
이 자료에선 생선을 뜻하는 한자로 방어진을 표기해 당시 방어진 앞바다에서 방어가 많이 잡힌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도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겨울이면 방어가 잡히고 있다.
일부에선 조선 시대보다 앞선 고려 때 적의 침입을 막은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에서 방어진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을 제기한다.
동음을 표기하면서 생선을 나타내는 한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경술국치 이전부터 일본인 부락 들어선 방어진
방어진과 일본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 시대 삼포 개항지 중 하나로 교역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전부터 일본인 부락이 형성된 곳이다.
방어진에 처음 일본 선박이 들어온 것은 1897년쯤으로 추정된다.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히나세(日生地)촌의 사람들이 조업 중 떠내려와서 피난한 것이 시작이다.
일본인 이주 어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06년경이며 1908년 '한국 어업법' 발표 이후 본격화됐다. 울산 앞바다까지 진출한 일본 어민이 다시 돌아갈 때 해상 사고 위험 등으로 눌러앉게 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히나세 어민의 집단지가 돼 이주 가구가 수백 개에 달해 '히나세 골목'이라는 명칭까지 생겨났다.
일본 기록에도 방어진을 한반도 남쪽 최대 어항으로 소개했다.
일본 어민들은 주로 울산 앞바다에서 고등어잡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등어잡이로 일본인 재벌도 생겨났고, 방어진을 쥐락펴락하는 지배자가 돼 갔다.
동해안 최초로 1928년 방어진 방파제를 만들어 대대적인 행사를 열고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광복 이후 일본인은 선박에 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싣고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것은 텅 빈 공허함 뿐이었다.
이후 방어진에는 포경업이 시작됐다. 우리 어민이 1948년 11월에 '동양포경회사'를 설립해 고래잡이를 했다. 장생포 포경산업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한때는 앞선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방어진항의 모습은 "포경선 한 척이 고래 두 마리를 포획해 배 양쪽 허리춤에 매달고 들어오는 광경은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구경꾼들이 꼬리를 물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다만, 1970년대 중반부터 방어진 포경은 장생포로 옮겨 단절된 것으로 전해진다.
◇ 세계 최대 조선소 현대중공업 건설…원주민 이주
현재 방어진은 세계 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으로 대표된다.
1972년 미포만을 기점으로 현대조선소의 건설이 시작됐다. 넓은 해안을 매립하여 도크장을 만들어가면서 한쪽에서는 선박을 건조해 나갈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근로자들의 영웅담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소 역사는 곧 원주민 이주의 역사이기도 하다.
조선소부지는 확장을 거듭하면서 미포동 주민들은 남목으로 이주하였고, 전하, 녹수마을 주민들도 두 번에 걸쳐 이주하게 된다.
산과 들, 논밭을 밀어 택지를 조성하면서 옛 마을과 정자, 제당과 당수나무, 공회당과 우물가, 마을을 수호하던 안산과 진산이 헐리고 사라졌다.
또 전국 팔도에서 근로자들이 모여들면서 이 지역 노동요, 지신밟기, 전설과 지명유래 같은 향토색이 두드러진 문화요소들이 모두 뒤섞여 향토색을 잃었다.
여기다가 조선소 외국 선주들이 상주하면서 외국인 거리도 생겨났다.
한때는 선주 가족까지 2천 명이 넘는 외국인이 방어진 거리를 채웠다.
수년 전부터 불어 닥친 조선업 불황에 이제는 그 외국인들도 크게 줄었고, 각지에서 모여든 근로자들도 빠져나가면서 다시 찾아온 적막함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은 "방어진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와 함께 근·현대 최대 호황을 누린 곳이기도 하다"라며 "방어진항의 잠재력이 지금의 어려움도 극복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cant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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