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유호 실종 20년]②'선적세탁' 4번 겪고 중국서 발견

입력 2018-09-24 13:02  

[텐유호 실종 20년]②'선적세탁' 4번 겪고 중국서 발견
텐유호→비토리아호→하나호→스칼렛호→산에이-1호
휴대폰으로 원격지시한 한국인 '이동걸'씨 존재 드러나





(서울·부산·자카르타·싱가포르=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텐유호가 자취를 감춘 지 두 달 반이 흐른 1998년 12월 1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장자강(張家港)에 '산에이-1'호라는 이름이 붙은 온두라스 선적의 배가 입항했다. 인도네시아 선원 16명이 승선한 이 배에는 팜유(油) 3천t이 화물로 실려 있었다.
중국 교통부 해양수색대는 이 배의 크기와 형태가 실종된 텐유호와 유사하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기고 닷새간 은밀히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선박이 일부 개조되었고 배 이름이 적힌 뱃머리 판자에 페인트가 덧칠된 흔적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 배는 엔진번호가 텐유호와 똑같았다.
말라카해협에서 사라졌던 텐유호와 똑같은 배가 산에이-1호라는 이름을 달고 중국 항구에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몇 달간에 걸친 수사로 밝혀진 일이지만, 2개월여건 사라졌던 이 배는 '텐유호'→'비토리아호'→'하나호'→'스칼렛호'→'산에이-1호'로 이름이 네 차례나 바뀌며 '선적 세탁'이 된 상태였다.

◇ 배 이름 변조되고 서류도 가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해양수색대는 12월 21일 이런 사실을 공안당국에 신고했으며, 중국 공안당국은 재빨리 관할 법원의 승인을 얻어 선박 억류 조치를 취하고 국제해사국 해적신고센터에도 이를 통보했다.
공안 요원들은 선박을 억류한 후 이 배에 타고 있던 인도네시아 선원 16명을 연행해 신문을 시작했다. 텐유호 소유주 측인 텐유해운도 23일 후베이성 우한(武漢)해사법원에 중국이 억류한 선박에 대한 압류를 신청했다.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은 1998년 12월 초에 인도네시아의 두마이항을 출발했다고 주장했으나, 인도네시아 정부에 조회해 본 결과 그 시기에 인도네시아 항구 어디에서도 '산에이-1'호라는 이름의 배가 출항한 적은 없었다.
이 배의 인도네시아인 선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등록번호와 함께 '산에이-1'호라는 배 이름이 적힌 서류를 제출했으나, 수사관들이 IMO 본부에 조회해 본 결과 서류가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선박 등록번호도 가짜였고 서류에 기입된 발급기관은 실존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런 실질적 단서가 없었던 텐유호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기대처럼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중국 공안부는 가짜 산에이-1호 선원 16명을 전원 연행하고 1999년 초까지 집중적으로 조사를 벌인 후, 이들이 텐유호 실종 사건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1999년 6월 23일에 전원을 석방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수사 과정에서 텐유호의 실종 경위를 규명하는 단서가 될만한 내용을 많이 확보했으나 상세한 진척 상황이나 관련자 진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주방자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998년 12월 31일 브리핑에서 가짜 산에이-1호가 사실은 텐유호인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설명하면서 "해적들이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밝혔으나 상세한 판단 근거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초 텐유호에 실려 있던 알루미늄괴 3천t이 사라지고 그 대신 팜유 3천t이 발견된 점도 미스터리였으나, 중국 당국은 이 사실만 한국 해양경찰청에 알렸을 뿐 팜유 적재 경위 등에 대한 수사 내용은 일체 함구했다.
텐유호 사건 수사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 오랜 기간 입을 다물고 있던 중국 공안부는 사건 발생 15년만에 중국경찰의 해적 단속 사례를 소개한 문건(中國警方打擊海盜備忘錄·이하 '비망록'으로 지칭)을 발간하면서 일부 내용을 공개했다.




◇ 중국 공안부 비망록 내용
2013년 9월 중국경찰망 웹사이트(www.cpd.com.cn)에 게시된 이 문건은 우리나라에 그간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이 처음으로 찾아 소개하는 것이다.
비망록 중 '텐유호 피랍사건'(天裕輪被劫案) 부분에는 "'선상폭력' 범행을 입증하는 다수 증거를 확보했고…(중략)…이동걸을 직접 심문해 범죄 연루 혐의를 밝혀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999년 1월 장쑤성 공안청, 쑤저우(蘇州)시 공안국, 장자강시 공안국은 산에이-1호의 정박 현장에서 상세한 조사를 진행한 끝에 이 선박이 실종된 텐유호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선박 설비 중 일부의 장착 일시와 선박 문건의 설비 변경 기록이 불일치했다. 또 선명(배 이름)과 선미에 표시하는 선적항 이름에 유성 페인트로 덧칠해 가린 흔적이 있었다. 선박 굴뚝에는 긁은 흔적도 있었다.
중국 수사당국은 "이 선박에서 (앞서) 엄중한 폭력사건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찾아냈다"며 "이런 증거들은 해당 사건의 성격을 판명하는데 기초가 됐다"며 당시 조사 내용을 밝혔다.



당시 중국 공안이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이동걸(1947년생)씨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수사는 한동안 급물살을 탔다.
비망록에 따르면 선원들은 미얀마 양곤항에서 이동걸이라는 한국인에게 고용돼 승선했다고 진술했다. 이동걸씨는 배에 타지 않았으나 휴대전화로 배에 지시를 내리면서 원격으로 '선장' 노릇을 했고 이에 따라 배가 중국에 왔다는 것이다.
원격 선장 노릇을 한 이동걸씨가 선박을 여러 차례 도색하고 선박 이름도 바꾼 사실도 조사에서 드러났다. 중국 공안은 "이동걸이 해적범죄에 가담한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비망록에는 이동걸씨가 한국 경찰에 1999년 2월에 체포된 후 중국 공안이 같은 해 8월 7∼13일 한국을 방문해 이씨를 직접 신문한 내용도 실려 있다.
중국 공안은 당시 이동걸을 신문해 '로저'(한국·중국 등 문건에 'Roser', 'Roger' 등 엇갈리는 복수 표기가 있음)라는 인도네시아인이 텐유호를 상대로 한 해적 활동에 가담한 혐의를 포착했다.
로저라는 인물은 텐유호가 행방불명이던 시기인 1998년 11월에 중국 근처 공해상에서 해적에게 강탈됐다가 장물로 나온 '챵셩'(長生)호라는 배를 사들이기도 했다는 것이 중국 공안의 설명이다.
중국 공안은 비망록에서 "이번 수사를 통해 로저 배후에 숨어 있는 주모자도 찾아냈다"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동남아 지역에서 암약해온 해적 집단들의 실체가 국제사회에 드러나게 됐다"고 자평했다. 이 주모자는 인도네시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모 화교 인사일 것으로 동남아시아 해적 사건을 추적해 온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수사 과정에서 텐유호가 1998년 10월 10일께 '비토리아'호라는 이름을 달고 양곤항에 입항했을 때부터의 행적은 어느 정도 규명됐으나, 이 배가 1998년 9월말 쿠알라항을 떠난 후 약 2주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한국과 중국의 수사 담당자들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심증을 형성했으며 이를 수사 기록과 보고서에도 남겼으나, 각국에 흩어진 용의자들이 함구로 일관하는 바람에 명확히 심증을 확인하거나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 국제 공조수사 미흡
수사가 한창이던 1998∼1999년 당시 한국,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홍콩, 미얀마 등의 수사기관과 해사기관들은 자국에서 활동하는 관련자들에 대한 정보가 꽤 많았으나, 대체로 정보 공유를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텐유호 선원들과 알루미늄 화물의 행방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장기 미제 상태로 남은 데는 초기 국제공조수사가 미흡했던 탓이 크다고 당시 수사 관계자들은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조민오 전 홍콩총영사관 치안관은 "중국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민주주의 정착이 오래된 싱가포르와 홍콩까지도 국제공조를 기피했다"고 회고했다.
싱가포르는 이동걸씨와 함께 텐유호 사건의 핵심 인물로 드러난 '베니 반'(Benny Ban)이 싱가포르인이라는 점, 홍콩은 삼합회 조직 등이 연루됐을 가능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조 전 치안관은 해석했다.
당시 한국 해양경찰청은 가짜 산에이-1호에 있던 알루미늄괴가 사라졌고 대신 팜유가 실려 있었다는 소식이 입수되자, 중국 장자강에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던 국제협력계장 박찬현 경감(현 중부지방해양경찰청장·치안감)과 외사반장 배진환 경위(현 울산해양경찰서장·총경)를 1999년 1월에 싱가포르로 급히 보내 알루미늄괴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싱가포르 경찰이 텐유호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베니 반의 거주지와 회사의 주소지를 제공받아 돌아본 것 뿐 별다른 소득 없이 귀국해야만 했다고 박 치안감과 배 총경은 아쉬워했다.
duckhw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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