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 연구사 "풍수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나라는 조선뿐"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조선 후기 지도책 '여지도'(輿地圖) 중 전주 지도를 보면 읍성 주변을 산이 에워쌌다. 가운데에 위치한 읍성 바깥은 사방이 온통 산이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실측해 제작한 지형도를 살피면 여지도와 차이가 눈에 띈다. 무엇보다 여지도에서 읍성 북쪽에 인접해 보이는 가련산과 건지산이 매우 멀다. 전주천 발원지인 완주 상관면도 여지도에서는 실제보다 매우 가깝게 표현됐다.
이러한 특징은 여지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산과 산줄기가 매우 강조됐고, 읍성은 배산임수 지형에 들어섰다.
지리학자인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는 창립 10주년을 맞은 한국고지도연구학회가 고지도 특별전을 여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최근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조선시대 그림식 고을지도에 투영된 풍수 인식에 대해 발표했다.
이 연구사는 "풍수 발생지인 중국은 무덤에만 풍수를 적용했지만, 우리나라는 궁궐과 집, 무덤, 종교시설, 마을, 도시 등 온 국토를 풍수 명당으로 만들고자 했다"며 "특히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이후 모든 도시에서 명당 논리가 모범으로 따라야 할 당연한 원리로 정착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16세기에 이르면 양반은 지방도시가 아닌 마을에 살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생겼고, 명당 논리도 마을로 확산했다"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마을은 물론 주택까지 풍수를 따지지 않는 공간이 없게 됐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으로 이뤄진 명당이 흔치 않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인위적으로 지형을 명당에 가깝게 만드는 비보풍수(裨補風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하지만 산을 쌓고, 물길을 내는 대역사를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연구사는 "실제 모습이 어떠하냐에 상관없이 조선 사람들의 소망에 맞추기 위해 지형을 명당으로 변형해 그리는 그림식 지도가 유행했다"며 "대부분의 그림식 고을지도에는 고을 지형을 완벽한 명당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 했던 조선 사람들의 열망이 풍부하게 담겼다"고 설명했다.
전주와 경상도 상주는 고려 후기에 고을 중심지가 정해졌다. 당시에는 명당에 터를 잡아야 한다는 관념이 희박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전주와 상주가 모두 예외 없이 명당으로 묘사됐다.
여지도에는 상주읍성이 원형이고 전주처럼 사방에 산이 있지만, 실제로 상주읍성은 사각형이고 주변은 매우 평탄하다.
이 연구사는 "명당 논리로 봤을 때 상주 지도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며 조선 후기에는 전혀 풍수적이지 않은 곳도 풍수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명당에 대한 강박감이 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명당 논리에 적합할 수 있도록 인위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취한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며 "이로 인해 다른 문명권이나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지도가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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