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다시·세운 프로젝트' 2단계 사업 '인쇄골목의 부활'
인쇄장인과 청년 디자이너 매칭한 '다시세운 인쇄기술학교' 하반기 오픈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인쇄산업은 어쩔 수 없이 옛날 방식과 지금방식이 공존할 수밖에 없어요. 옛것에만 머물러서도 안되고, 새로운 것을 쫓아가면서 신구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죠."
충무로 인쇄골목에 자리한 특수인쇄 전문기업 '비주얼봄'의 신길섭 대표는 자신의 말처럼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삶을 산다.
1988년 충무로 인쇄골목에 들어와 일을 배우고 '비주얼봄'을 차려 안착시키기까지 지난 30년간 신 대표는 충무로 인쇄골목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냈고, 인쇄골목의 쇠퇴 속에서도 변화를 꾀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신 대표는 인쇄골목을 지켜온 오래된 장인인 동시에, 수출길을 개척해 2018년에도 여전히 잘나가는 인쇄업자이다. 한때 '구닥다리'라며 자취를 감췄던 '레터프레스'(동판에 잉크를 발라 눌러서 찍는 기법)를 다시 도입하고 고급화 전략을 통해 호주 등지에 명함을 대량 수출하고 있다.
서울시가 진행하는 세운상가군 재생사업 '다시·세운 프로젝트' 2단계 사업인 '충무로 인쇄골목 부활'에는 신 대표 같은 인적 자원이 꼭 필요하다.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를 현장 중심의 인쇄기술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청년들이 찾아오는 인쇄·디자인의 혁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이 프로젝트는 신 대표 같은 장인들을 모아 '다시세운 인쇄기술학교'를 하반기 열 계획이다. 또한 인쇄현장을 둘러보고 체험하는 인쇄골목 투어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이를 통해 인쇄 장인과 청년 디자이너를 매칭해 충무로 인쇄산업의 보존과 발전을 이끈다는 목표다.
신 대표는 "싸게만 만든다고 좋은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좋은 것, 예쁜 것을 사람들이 알아본다"며 "아날로그 감성이 좋아 레터프레스를 다시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 트렌드에 맞게 됐고, 조금 비싸도 사람들이 찾는다"고 말했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상당히 많이 안 좋은 상황이죠. 하지만 누굴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산업의 발전과 경쟁 심화 등 여러 요인이 결합된 거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아직 충무로 인쇄골목이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능성이 있는 거죠. 시대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고 그 방향을 따라 잘 가야죠. 인쇄업은 도심형 산업이기에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고, 낡아서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트렌드에 맞춰 변화를 해야 하는 거죠."
충무로 인쇄골목을 40년 지켜온 현대금박 김용춘 대표도 서울시가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얼굴로 내미는 인물이다.
"충무로에서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어서 안타깝다"는 김 대표는 레터프레스 방식을 배우겠다는 후학이 있으면 언제든 시간을 낸다.
김 대표는 "레터프레스는 동판에 잉크를 발라 찍어내기 때문에 색상을 고급화할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색깔을 만들어서 찍을 수 있고, 제품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며 "청년들이 많이 배워서 자립하거나 취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행정구역상 인현동인 충무로 인쇄골목은 다른 인쇄업 집적지역(파주, 일산, 부천, 영등포, 성수동, 안산지역)과 비교할 때 업체당 종사자 수가 적고 조직형태에서 개인사업체 비중이 높다. 5천여개 인쇄소가 모여있는 인현동의 업체당 평균 종사자 수는 2.75명으로 전국 8개 인쇄업 집적지 중에서 가장 적은 수준이다.
또한 대부분이 30~40년 한자리에서 일해온 기술 장인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인쇄골목에는 빈 가게가 속출하고 있다. 문제는 빈 가게를 새롭게 채우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다. 기술 장인들의 명맥이 끊기는 것이다.
서울시는 인쇄 관련 업종이 도심에 집적된 충무로 인쇄골목의 장점과 효율성을 살려 나가고, 청년 디자이너들을 유입해 이곳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지난 20년 하향곡선만을 경험한 인쇄업체들의 동참을 끌어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한때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호황을 누렸으나 2000년 전후로 내리막길을 걸어온 대부분의 인쇄 장인들은 마음의 문을 많이 닫은 상태다.
인쇄골목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경일재단 이순교 대표는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최대 위기였다. 부도가 속출했고 견디다 못해 가게를 접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며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라고 말했다.
경일재단의 다른 한켠에 작업공간을 낸 김양호 대표는 "88올림픽때부터 1990년대까지가 인쇄골목 최고 호황기였다. 그때는 기계를 돌려놓고 밥을 먹으러 갔고 배달차량이 골목을 가득 채워 서로 빨리 가려고 매일 싸움이 났을 정도"라고 돌아봤다.
이 사랑방을 찾아오는 다른 인쇄업자들도 "경기가 안 좋아서 뭘 더 해볼 생각은 없고 그냥 이대로 은퇴할 때까지 유지라도 했으면 하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눌러서 찍는 타공식 인쇄가 주를 이루는 점자인쇄에서 '물방울인쇄'를 개척해온 건우점자인쇄의 김진호 대표는 "나 나름대로는 이 정도면 점자업계에서 나를 쫓아올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장사가 너무 안되니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서울시가 인쇄골목 업체와 창작자를 매개하기 위해 운영하는 '지붕없는 인쇄소' 이란 소장은 "30여년 인쇄골목을 지켜온 분들은 모두 기술 장인이다. 단순히 기계를 돌린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장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했다.
"인쇄물 색깔의 채도와 명도를 따지고, 질감을 따지는 분들인데 당연히 인쇄장인이죠. 이들 장인의 경험과 노하우가 사라지지 않게 장인들과 청년들을 연결하고, 청년들이 인쇄 현장을 실제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만들어 인쇄골목에 다시 활기가 돌게 하려는 겁니다. 도시재생이라는 게 건물 하나 새롭게 올리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역산업을 같이 육성해서 지역 생태계가 잘 돌아가게 하자는 게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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