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국청년, '현악기 명장' 스트라디바리 후예로 '우뚝'(종합2보)

입력 2018-09-28 07:55   수정 2018-09-28 09:51

20대 한국청년, '현악기 명장' 스트라디바리 후예로 '우뚝'(종합2보)
세계 최고권위 伊현악기제작 콩쿠르서 정가왕 씨 우승 '쾌거'
크레모나 국제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금메달 비롯해 4관왕
콩쿠르 역사상 한국인 우승자 최초 탄생…박지환, 첼로 2위·바이올린 3위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앞으로 더욱 정진해 스트라디바리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소리가 더 깊어지는 현악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레고 조립을 유달리 잘하던 한국 청년이 현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지 불과 6년 남짓 만에 전설적인 현악기 '명장' 스트라디바리의 후예로 우뚝 섰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사상 최초로 한국인 우승자가 나왔다.
재이탈리아 교민 사회와 현지 언론에 따르면 26일 폐막한 '제15회 크레모나 국제현악기제작 콩쿠르-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에서 현악기 제작자 정가왕(28) 씨가 첼로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정 씨는 이번 콩쿠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stenibile leggerezza dell'essere)이라는 이름의 첼로를 출품해 당당히 1위로 호명됐다.


단풍나무로 만든 정 씨의 첼로는 행사를 주최한 크레모나 바이올린박물관 '무제오 델 비올리노'에 2만4천유로(약 3천100만원)에 매입돼 역대 우승작품들과 함께 박물관에 영구적으로 보관·전시된다.
이 박물관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활동한 전설적인 바이올린 장인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주세페 과르네리 등이 만든 악기를 소장하고 있는 현악기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스트라디바리의 이름을 따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콩쿠르로도 불린다.3년마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현악기 명장들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 4개 부문에서 갈고 닦은 제작 실력을 겨루며 진정한 스트라디바리의 후예를 가리는 '꿈의 무대'이다.
악기의 외관과 소리를 10명으로 구성된 현악기 제작 장인과 연주자들이 까다롭게 평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이 없을 경우 시상자를 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자는 정가왕 씨가 출품한 첼로 부문, 프랑스 장인이 수상한 바이올린 부문에서만 나왔다.
1976년 시작된 이 콩쿠르의 42년 역사상 한국인 우승자가 탄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대회까지 크레모나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거둔 최고 성적은 동메달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서성덕 씨가 첼로 부문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그동안 첼로와 비올라 부문에서 동메달만 3개가 나왔다.



이번 대회 최연소 입상자이기도 한 정 씨는 또한 크레모나 시가 30세 미만 참가자 가운데 최고의 제작자를 선정해 주는 '시모네 페르난도 사코니상', 크레모나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악기 박람회인 '몬도 무지카'에서의 전시 기회가 제공되는 '크레모나 몬도 무지카상', 크레모나의 외국인 현악제작자의 출품 악기 중 최고 점수를 얻은 악기에 주어지는 상까지 휩쓸어 4관왕에 올랐다.
크레모나 콩쿠르는 나이와 무관하게 현악기 명장들이 총출동하는 무대라 20대 청년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꼽힌다. 특히, 바이올린이나 비올라에 비해 갑절의 제작 노력이 필요한 첼로 부문에서 우승자가 나온 것은 2009년 이후 이번이 9년 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인천 계산공고 졸업 후 한국외대에 진학했으나 1학기 만에 휴학한 정 씨는 한국에서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 연주에 흠뻑 빠진 뒤 바이올린 제작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바이올린 제작과 이탈리아어 등을 익힌 후 이탈리아에 건너와 2012년 크레모나 국제현악기제작학교의 3학년에 편입한 뒤 2015년 졸업한 그는 이듬해 프란체스코 토토 명장의 공방에 들어가 그에게 악기 제작을 직접 배우고, 함께 악기를 만들고 있다.
스승인 토토 씨도 2006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크레모나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해, 같은 공방에서 일하는 스승과 제자가 12년의 시차를 두고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차례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 씨의 악기는 첼로를 이루는 네 줄의 균형감, 오묘한 악기의 색깔과 깊은 소리 등을 인정받아 이번 대회에 출품된 75대의 첼로 가운데 최고상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몇 년 되지 않은 데다 그동안 굵직한 대회 입상 경력도 거의 없는 정가왕 씨의 수상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대회 우승 전에 그의 수상 경력은 2016년 5월 열린 이탈리아 국내대회에서 비올라를 출품해 3위와 베스트 사운드상을 탄 정도에 불과하다.
"학교 졸업과 취업, 직장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틀에 박힌 삶을 살기보다는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어 현악기 제작자의 삶을 택했다"는 정 씨는 "1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첼로를 만들었지만, 우승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꿈만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 씨는 현악기 제작에 입문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상을 탄 비결을 묻자 "어린 시절에 레고 조립을 유독 잘했다"며 "손으로 뭘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해 현악기 제작이 적성에 딱 맞았던 것 같다. 운이 좋았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정 씨는 이어 "배울 게 한참 많고, 아직 부족한 점도 많다"며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콩쿠르 우승자라는 수식어에 부끄럽지 않도록 앞으로 더 정진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악기를 관상용으로 만드는 게 아닌 만큼, 무엇보다 연주자들이 편하게 느끼고,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며 스트라디바리처럼 세월이 지날수록 소리가 깊어지는 악기를 묵묵히 만드는 것이 긍극적인 목표"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콩쿠르에서는 역시 크레모나에서 명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지환(36) 씨도 첼로 제작 부문 은메달, 바이올린 제작 부문 동메달 등 2개 부문에서 동시에 입상하는 쉽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박 씨는 2016년 5월 폴란드에서 열린 '제13회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2대를 출품해 1, 2위를 독식하는 등 일찌감치 현악 명장들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정 씨와 박 씨가 메달을 합작하며, 한국인 현악 명장들은 이번 콩쿠르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골고루 1개씩 따는 경사를 연출하며, 한동안 유럽과 일본이 독식하다시피 하던 현악기 제작 부문에서 한류가 거세게 일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특히, 이번 콩쿠르에서는 4개 부문, 총 21명의 결선 진출자 가운데 무려 5명이 한국 제작자로 채워지는 등 한국인들의 활약이 어느 해보다 두드러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가왕 씨와 박지환 씨의 작품은 27일부터 내달 14일까지 다른 수상작들과 함께 크레모나 바이올린 박물관에서 전시된다.

ykhyun1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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