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입력 2018-09-30 04:00   수정 2018-09-30 17:11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해방운동 막 시작한 호찌민,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사료로 첫 확인
호찌민, 김규식·황기환 등 임정 인사들 도움 받으며 베트남 독립의지 다져
佛 정보경찰 "호찌민 계획에 미리 대비하려면 한국인들 펴낸 간행물 살펴봐야"
재불 연구자 이장규씨, 佛 국립 해외영토자료관 샅샅이 뒤져 찾아내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0년 전후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찌민(胡志明·1890~1969)이 파리에서 약소국의 설움과 독립에의 열망을 나눈 내용이 프랑스 정부자료로 처음 확인됐다.
호찌민이 젊은 시절 파리에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감화돼 이들과 밀접히 교류하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희귀자료다.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경찰관은 이런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고 이 문건들은 프랑스 자료관을 뒤지던 재불 한국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30일(현지시간) 한국사 연구자 이장규 씨(파리 7대 박사과정·한불독립운동사연구회 '리베르타스')는 프랑스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에서 찾아낸 자료를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이 1919~1920년 작성한 보고서로 당시 프랑스에 체류하던 호찌민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겼다.
호찌민은 조국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의 수도에서 2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해 훗날 프랑스·미국과 전쟁을 벌여 이기고, 베트남의 국가주석까지 지냈다. 베트남인들은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그는 일찌감치 서구로 건너가 런던·뉴욕 등지에서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1919년 파리에 정착, 애국(愛國)이라는 뜻의 이름 '응우옌 아이 꾸옥'으로 살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 평화회의가 열리던 파리는 당시 식민지국들에서 건너온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호찌민을 감시하던 프랑스 경찰이 대한독립의 당위를 강대국에 알리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활동상까지도 함께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평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을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파리위원부를 설치해 활동하고 있었다.


◇"호찌민, 한국인들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아"
이 자료에는 호찌민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핵심인물 김규식, 황기환, 조소앙, 윤해 등을 만나 교류한 내용이 상세히 담겼다. 특히 그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모범으로 삼아 활동한 것이 눈에 띈다.
경찰관 '장'은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적었다.
임정 파리위원부 인사들의 활동계획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전망도 이렇게 덧붙인다.
"호찌민의 계획에 대비하려면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펴낸 간행물들을 살펴봐야 한다. 파리의 한국인들도 간행물을 창간하려는 것 같다."
호찌민이 임정 인사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한 것을 보여주는 일화도 풍부하다.
"한국인 황씨는 호찌민과 아주 친밀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대화했다."
황씨는 임정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이다. 호찌민은 심지어 자신을 감시하는 경찰관 '장'을 황기환에게 소개해 주는 대범함까지 보인다.
"호찌민은 나를 한국인 대표부 서기장인 황에게 소개해줬다. 우리는 러시아·스웨덴을 거쳐 프랑스에 온 한 한국인과 대화했는데 이 사람은 영어도 불어도 잘 못 해서 더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언급된 한국인은 독립운동가 윤해(尹海)로,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회의가 끝난 9월에야 도착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임정 인사들, 佛 지리학회서 일본 성토…프랑스 교수, 일제 잔혹성 증언
황기환이 프랑스 학계·정계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귀중한 순간도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는 1920년 1월 8일 저녁 파리의 지식인들이 모여들던 생제르맹가(街) 모처에서 열린 프랑스 지리학회 모임에서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라는 제목의 분과 연설자로 나선다.
프랑스 국회의원, 교수, 중국·베트남인은 물론 일본인까지 참석한 이 자리에서 그는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과 일본을 잘 아는 중국인노동자회 사무총장과 펠리시앙 샬레(대학교수)씨에게 연설을 넘긴다"고 했다고 경찰보고서에 적혀있다.
황기환의 바통을 이어받은 프랑스 대학교수 펠리시앙 샬레의 발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3·1 운동과 일제의 만행에 대해 미리 준비한 영상까지 틀어 보여주면서 일본을 규탄한 것.
경찰은 이 연설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방문했던 한국의 서울에 관한 생각은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첫 독립 시위(3·1 운동)를 목격했는데, 여성들이 제 몫을 다한 행동들을 인용하고는 시위 형태와 그 열기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또 여성들을 강간하고 사람들을 십자가로 처형하는 사례를 인용하며 일본의 잔혹함을 증언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영상도 상영)"
샬레 교수는 "한국의 유구한 문명은 일본에겐 교사였다. 2천만 한국인은 일본에 자결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고 덧붙인다.
이런 규탄은 학자적 양심에 따른 것이겠지만 파리에서 끈질기게 활동하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활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황기환과 함께 학회에 참석한 호찌민은 연설을 거부당했다. "베트남 인구도 한국과 비슷하다. 간단히 할 테니 연설을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학회장이었던 소르본대 교수는 이를 거절한 것.
경찰 '장'은 이때 쓴 보고에서 호찌민과 임정 인사들의 동지적 협력관계에 주목한다.
"호찌민은 파리의 한국 대표단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들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요구하고자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온 이들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통신국'을 열었다. (한국인들은) 호찌민이 이 통신국을 자유롭게 쓰게 했고, 그의 저작과 홍보물, 한국 학생들이 미국서 출판한 한국평론 등도 파리에 유포됐다."


◇김규식, 호찌민이 佛서 쓴 글 中에 간행되도록 도와…인터뷰도 주선
호찌민은 임시정부 외무총장이자 파리위원부 대표였던 김규식(훗날 임정 부주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호찌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도 프랑스 자료에 자세히 담겼다.
경찰은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찌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찌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찌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기도 했다.
이번에 발견된 보고서들은 3·1 운동을 전후해 파리에서 체류하던 임시정부 인사들의 활약이 베트남의 해방투쟁에까지 영향을 줬다는 것을 입증하는 희귀 자료로 평가된다.
실제로 호찌민은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국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고, 프랑스 일간지 르 포퓔레르에 1919년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라는 글을 투고,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교하기도 한다.
자료들을 찾아낸 이장규 씨는 "이 자료는 호찌민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주인공은 임시정부 인사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댈 데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파리에서 활약하던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고 말했다.
국내 사학계도 호찌민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수석연구위원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대한 연구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획기적 자료이며, 파리의 임정 인사들이 다른 식민지 약소민족 활동가들과 연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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