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가디언 "서방의 발칸반도 세력 확대 견제하는 러시아, 조직적 방해 정황"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압도적인 찬성표에도 불구하고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투표율 때문에 맥이 빠진 마케도니아의 국호 변경 국민투표는 러시아의 또 다른 승리라는 분석이 나왔다.
1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마케도니아 국민투표는 언뜻 보면 순수한 국내 문제 같지만, 실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권의 승리이자,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패배로 해석되는 동시에 서구의 민주적 절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의 수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좋은 예라고 보도했다.
그리스와의 합의안에 따라 나라 이름을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하는 것을 놓고 지난달 30일 실시된 마케도니아 국민투표에서는 전체 투표자 가운데 찬성표가 90% 이상을 넘어, 5%선에 그친 반대표를 압도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 180만명 가운데 고작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6%만이 투표에 참가해 과반에 훨씬 미달하는 초라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유럽 최빈국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미래를 위해 EU와 나토에 가입함으로써 서방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청사진 아래 지난 6월 그리스와 국명 변경 합의안에 전격 서명한 조란 자에브 총리는 이로써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국가적 자부심이 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그를 배출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중심지인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마케도니아의 EU와 나토 가입에 번번이 발목을 잡아왔다.
자에브 총리는 투표율이 과반에 미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찬성표가 월등히 높은 점을 강조하며, 야당을 설득해 헌법 개정을 완료하고 나라 이름을 '북마케도니아'로 개정하는 절차를 완료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국민의 절반도 참여하지 않은 국민투표 결과를 내세우며 헌법 개정을 밀어붙이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워졌다는 관측이다.
이번 국민투표의 투표율이 예상보다 크게 낮아진 것에는 러시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필두로 짐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 등 서방의 거물급 인사들이 국민투표를 앞두고 앞다퉈 마케도니아를 찾아 EU와 나토 가입을 위해서는 국호 변경이 선행돼야 한다며 찬성 투표를 적극 독려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서방 지도자들은 발칸반도에서의 서방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는 러시아가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무력화하기 위해 선거 보이콧을 조직적으로 독려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해 왔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달 마케도니아 방문 당시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국민투표 부결을 노리고, 현지의 국명 변경 반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다른 많은 나라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들을 마케도니아에서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2016년 미국 대선을 비롯해 서방 세계의 선거에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 러시아가 마케도니아 국민투표 선거 국면에서도 '가짜뉴스'와 해킹, 가짜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 생성, 비밀 송금 등의 방식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서방측 외교관들은 국민투표 선거운동이 절정에 달한 지난 달 페이스북에 국민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계정이 하루 40여 개씩 생성됐다고 전한 바 있다.
"당신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용하려 합니까"라는 질문을 담은 이들 페이스북 계정들은 마케도니아의 잠재적 '폭탄'인 슬라브계 마케도니아 주민들과 소수 알바니아계의 민족 갈등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최근 수도 스코페에서 경찰과 무력 충돌한 국호 변경 반대 진영의 시위대 가운데 일부 참여자는 정체가 모호한 인사들로부터 소란을 일으키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것도 러시아를 향해 쏠린 의혹을 뒷받침하는 예로 거론된다.
앞서, 마케도니아 국명 합의의 당사국인 그리스 역시 그리스 내의 마케도니아 국명 반대 시위를 지원했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 7월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해 러시아와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ykhyun1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