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개 이름 지닌 천재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입력 2018-10-06 06:03  

120개 이름 지닌 천재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시선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생각한다는 건/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을 때/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시 '양 떼를 지키는 사람' 부분)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의 시선집 두 권이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출간됐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라는 제목을 달았다.
국내에 페소아 대표 시들을 원전 번역으로 소개하기는 처음이라고 민음사는 설명했다.
그동안 그의 시가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시인들 입을 통해 종종 듣곤 했다. 좋아하는 시인으로 페소아를 꼽거나 그의 시 구절을 작품에 인용하는 문인들도 있었다. 세계적인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셰익스피어, 조이스, 네루다와 함께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중 하나로 페소아를 꼽기도 했다.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일찍 친아버지를 잃고 외교관인 새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다.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학업을 중단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생 여러 잡지와 신문에 130여 편 산문과 300여 편 시를 발표했으나, 생전에 출간한 저서는 시집 '메시지'(1934)가 유일하다.
1915년에는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 시초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오랫동안 틈틈이 적은 단상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1935년 47세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돼 지금까지도 분류와 출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 그의 특징은 수많은 이명(異名)을 썼다는 점이다. 적게는 70여 개에서 많게는 1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시선집에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이름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로 쓴 대표작을 골라 실었다. 또 본명으로 유일하게 펴낸 시집 '메시지' 일부도 수록했다.
"오 소금기 바다여, 너의 소금 중 얼마만큼이/포르투갈의 눈물인가?/너를 건너느라,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눈물 흘렸으며,/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부질없이 기도했던가!/또 얼마나 많은 신부들이 결국 결혼에 이르지 못했는가/너를 우리 것으로 만드느라, 아 바다여!" ('메시지'에 수록된 '포르투갈의 바다' 부분)
포르투갈 포르투대학교에서 페소아 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딴 김한민(39) 씨가 번역을 맡아 이번 시선집을 엮었다. 그는 그래픽노블 '혜성을 닮은 방' 시리즈 등을 펴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연합뉴스에 "페소아 시의 정수는 다양함, 다채로움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깊이 있고 풍부하게 표현한 사례는 문학사상 없었던 듯하다. 카에이루 이름으로 쓴 '양 떼를 지키는 사람'을 보면 한 시인 안에서도 다채로움과 복수성을 느낄 수 있다. 캄푸스 이름으로 쓴 시는 굉장히 도발적이고 창조적인 부분도 있다. 그의 시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현재성을 느낄 수 있다"고 소개했다.
페소아가 수많은 이명을 쓴 배경으로는 "본인 스스로 상당히 많은 자아를 느꼈던 듯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다중 자아를 분출하는 하나의 표현 틀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 정도로 복수의 정체성을 폭발시킨 사람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독특하다. 이런 독특함이 또 하나의 정체성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페소아는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은 이제 초기 단계"라며 "독자들이 처음 읽을 때 페소아라는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 마디 설명으로 환원하려 하지 말고, 여러 다른 결들을 있는 그대로 느꼈으면 한다. 그렇게 접근하면 그의 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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