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디자인은 좋은 와인과 같은 풍미 자랑…잘 숙성해야"

입력 2018-10-11 15:35  

"좋은 디자인은 좋은 와인과 같은 풍미 자랑…잘 숙성해야"
'디자이너들이 존경하는 디자이너' 카럴 마르턴의 첫 한국 개인전
합리적 체계·시적 감성 결합한 작업…"요즘 디자인 교육 협소"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인상주의 탄생을 알린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1872) 배경이 된 곳은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다. 한적한 바닷가였던 이곳은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명으로 항구도시로 거듭났다.
도시 건설 500년을 맞은 지난해 르아브르 바닷가에는 색색의 파도가 일었다. 해수욕객들이 쉴 수 있는 이동형 컨테이너 700여개가 다양한 색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멀리서는 색 건반처럼 보이는 '해변의 색깔'은 네덜란드 그래픽디자이너 카럴 마르턴(79)의 작업이다.
단조로운 해변에 활력을 불어넣은 작업이 더 특별한 것은 프랑수아 1세가 제정한 법령에 현대 암호 해독법을 적용해 도출한 색채 알고리즘을 따라 색줄의 폭과 배열 방식을 정했기 때문이다.
마르턴은 이처럼 수학적 체계 위에 시적인 감성과 사회적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마르턴이 디자인한 '카럴 마르턴: 인쇄물'은 1998년 라이프치히 북페어에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디자인된 책'으로 선정됐다. 작가는 1996년 '하이네켄 예술상'에서는 네덜란드 최고 그래픽 디자인상을 받았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디자이너들로부터 특히 존경받는 마르턴의 60년 작업세계를 소개하는 첫 한국 개인전 '스틸 무빙'이 11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전시장에서 자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가 15년 이상 연구한 아이콘-픽셀 언어다.
1층 마당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 '아이콘 뷰어'는 멀리서 보면 행인들을 비추는 것 같다가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만화경을 보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다양한 색상과 형태의 수천 개 아이콘이 명멸하는 모습은 신비롭다.
각자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원 3개를 겹친 듯한 '쓰리 타임스'는 시·분·초를 재해석한 설치 작품이다. 커미션 작품인 '암스테르담과 서울 시차' 또한 두 도시의 시차를 착시 현상과 숫자 디자인을 활용해 시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디자인 작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라면서 "특히 시간과 시계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서 관심을 둬왔다"고 설명했다.
슬기와민, 김영나를 비롯한 한국인 제자도 여럿 둔 작가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 디자인이 좀 더 자유롭고 실험적인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39년생인 마르턴은 그래픽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회화와 조각 등 다양한 예술을 접한 것이 작업에 더 도움이 됐다고 했다.
작가는 "요즘에는 정말 디자인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 교육이 협소하다"라면서 "다른 분야도 아우르는 더 넓은 의미의 디자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좋은 와인이 그러하듯, 디자인도 오래 지속되는 풍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젊은이들에게 자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디자인을 잘 숙성시키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문의 ☎ 02-6929-4470.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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