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윤근영 논설위원 = 청년 전태일은 일터인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에서 집이 있는 도봉산 기슭까지 2∼3시간이나 걸어서 퇴근하곤 했다. 점심을 거르는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다 보니 차비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몸이 밤이슬에 젖어 어깨는 축 늘어지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돼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뿐 아니다. 전태일은 어린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밤늦도록 혼자 작업장에 남아 대신 일을 해주기도 했다. 시다들이 아프면 약방에 데려가는 그를 업주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1960년대, 1970년대 당시 영세 피복 제조업체의 시다는 주로 12∼14세의 어린 소녀들로, 미싱사와 재단사의 보조업무를 하면서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태일 열사가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이유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인은 평생 참혹한 가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고귀한 희생정신과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은 채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분신 항거는 노동운동뿐 아니라 학생운동, 농민운동, 재야운동, 종교운동의 자양분이 됐고, 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타올랐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일어선 노조는 노동자 권리를 찾는 데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사회 곳곳의 불공정을 거둬냈고, 바닥으로 추락한 인권을 들어 올렸으며,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한마디로 사회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노조를 응원했고, 노동운동가를 존경했다. 수많은 사람이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들은 전태일의 후예였다.
그런데 현재 노조들은 어떤가. 일부 대형 사업장의 고용세습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정년 퇴직자, 장기 근속자 등의 요청이 있으면 결격사유가 없는 한 그 직계가족을 먼저 채용한다' 등의 노사 단체협약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입사후보자들과 동일한 조건에 있다면 노조원의 자녀를 먼저 채용한다는 것이니 대단한 특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용세습은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박탈하고 꿈과 희망을 무너트리는 행위다. 몇 년간 혼신을 다해 취업준비를 해왔던 청년, 당장 취직을 해야 하는 가난한 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입사 응시 결과를 기다리면서 밤잠을 못 이룬다. 부모가 해당 회사의 노조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종 경쟁에서 탈락했다면 그 억울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서울시 산하 한 공기업에서는 기존 직원들의 자녀, 부인, 부모, 며느리, 형제 등 가족들이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으로 전환돼 논란이 일고 있다. 노조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경영진이 이런 일을 추진한다고 하면 오히려 노조가 막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용세습 문제 외에도 전국 사업장에서는 노조 간부가 취업 사기에 가담해서 구속되는 사례들도 있다. 취업준비생의 절박한 심정을 악용하는 범죄행위다. 비정규직의 노조가입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노조들도 있다. 기존 정규직들의 임금과 복지에 부담을 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지나친 임금인상 요구가 하청업체 근로자의 임금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다면 올해 만 70세가 된다. 그는 이런 현실에 대해 뭐라고 할까.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심각하게 불공정한 일들이 많다. 재벌 3∼4세들이 경영능력 검증 없이 일감몰아주기로 부당하게 경영권을 획득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계열사들 여기저기에 사내이사 등의 직함을 깔아놓고 연간 100억원 안팎의 연봉을 챙기는 재벌총수들도 있다. 젊은 시절에 고시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한 번도 근무한 적이 없는 공기업의 사장으로 자랑스럽게 내려가는 낙하산 관료들도 있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사실상 사건 수임을 몰아주는 '전관예우'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자신의 전문성과 무관한 분야에서도 한자리를 꿰차는 기술 좋은 정치꾼도 적지 않다.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이 평생 구경할 수 없는 특권을 다양하게 누린다.
이들의 이런 특권은 조선 시대의 양반보다 덜할지는 모르겠지만 불공정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조선의 양반은 전 인구의 2% 안팎이었는데, 군대에도 안 갔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수십명, 수백명의 노비를 부리거나 농민들에게 소작을 줘서 떵떵거리고 살았다. 과거시험 응시와 교육의 기회도 거의 독점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지독한 착취다.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불공정은 역사가 어느 정도 흐른 후에 보면 범죄에 가까운 착취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력이 약하고, 권력도 없는 평범한 시민으로부터 권리와 돈, 꿈과 희망을 빼앗아 가는 행위다. 이걸 지적하고 해결하는 데 노조가 나서야 한다. 불공정성을 뜯어고치는 노력을 하고, 주변의 아픔에 좀 더 눈을 돌려야 한다.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노조는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함몰돼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노조는 갈수록 입지를 잃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개혁의 에너지를 상실할 수 있다. 노조가 전태일 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에 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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