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억불산 자락의 '보석' 편백숲 우드랜드
(장흥=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 대신 푸른 하늘과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건강에 이롭고 치유가 되고 휴식이 된다. 노동으로 채워지는 일상에서 짬짬이 기지개를 켜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짧은 시간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작정하고, 온전히, 건강과 치유와 쉼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을 돌아봤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 쪽 끝자락에 자리해 정남진이라 일컫는 전남 장흥의 억불산(518m) 자락. 이곳 36만 평 대지에 들어선 편백숲 우드랜드는 '치유의 숲'이다. 항균 작용을 하는 피톤치드를 많이 뿜어낸다는 편백이 빼곡하다. 숲을 안내하는 숲 해설사뿐 아니라 산림이나 보건 분야를 전공한 산림 치유 지도사가 상주하며 산림 치유 프로그램을 이끈다. 그저 숲을 거닐며 숨만 쉬어도 좋지만, 지도사가 이끄는 대로 오감에 집중하며 느끼는 숲과 그에 반응하는 몸의 감각은 완전히 다르다.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선선한 것이 제법 가을다운 10월의 초입이었다. 편백숲 입구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은 숲 치유센터에 도착하니,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 가을이 꽉 차 있다. 솔방울부터 도토리와 밤은 물론, 벌어진 동백 열매껍질과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동백 씨, 튤립 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튤립나무 열매, 한 뼘 남짓 길이로 잘라놓은 칡 줄기가 바삭한 가을 햇살 아래 몸을 말리고 있었다. 유아 숲 체험 프로그램에서 쓰일 수업 재료들이다. 칡 줄기로 비눗방울을 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하경좌 산림 치유 지도사와 함께 편백숲으로 들어섰다. 50∼60살은 족히 먹은 키 큰 편백 사이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따라간다. 높이 자란 나무가 하늘을 다 가렸다. 일본이 원산인 편백은 몸집을 키우며 탈락하는 껍질이 손을 대면 바스러질 듯 얇다. 뿌리는 땅속으로 깊이 내리지 않고 옆으로 자라 땅 위로도 많이 드러난다. 위로는 40m까지 쑥쑥 자라는 것에 비하면 뿌리를 깊이 박지 않으니 바람에 약하다.
그래서 몇 년 전 대형 태풍에 키 큰 편백이 뿌리째 쓰러져버린 곳에는 새로 심은 어린나무가 자라고 있다. 편백은 강력한 피톤치드 작용으로 산림욕에 좋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목재로서도 내수성과 내구성, 항균성이 뛰어난 데다 부드러운 촉감과 색깔, 특유의 향 덕에 원목 그대로 내장재와 가구용으로 많이 쓰인다. 물이 닿으면 향이 더욱 짙게 퍼지는 히노키(편백) 욕조가 대표적이다.
◇ 맨발로 걷는 '편백톱밥길'
오솔길이 끝나고 편백톱밥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발을 내디디니 맨발바닥에 닿는 편백 톱밥의 감촉이 서늘하지만 부드럽고 포근하다. 하 지도사는 발뒤꿈치부터 발바닥 전체로 땅을 디디고 발을 뗄 때는 발바닥 앞쪽에 힘을 주며 천천히 걷는 게 좋다고 했다. 돌부리가 보인다고 굳이 피하지 않아도 된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돌부리에 발바닥 이곳저곳을 지그시 누르며 자극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느낌이, 발바닥 가운데와 주변이 받는 자극이 다르다. 하얀 편백 톱밥 위에 떨어진 초록색 편백 잎에 눈도 즐거운 길이다. 적당히 맨발로 걷기를 즐기고 나면 여름철엔 족욕장에서 발을 씻기도 하지만, 그냥 바위에 걸터앉아 발바닥에 묻는 편백 톱밥과 흙을 툭툭 털어내고 그대로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는 것도 좋다.
◇ 시간이 멈추는 '사색의 숲'
사색의 숲은 우드랜드 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그래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는 곳이다. 한때는 맨몸에 종이옷만 걸치고 피부로 숲의 신선한 공기를 직접 느끼는 풍욕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당시 설치한 대나무 가림막이 남아있어 조금 더 은밀한 공간이다. 치유 프로그램에서는 요가로 몸을 이완시킨 다음 이곳 평상에 자리를 깔고 누워 명상을 하는데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평상 말고도 테이블과 벤치, 토굴, 선베드, 해먹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으면 된다. 선베드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과 하늘을 향해 솟은 나무는 평소의 눈높이에서 보는 하늘과 나무와는 다른 모습이다. 또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과 부대끼는 소리로, 실려 오는 흙과 나무 냄새로, 뺨을 스치는 촉감으로 바람을 느끼는 일이 이렇게나 좋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울창한 숲에서 스포트라이트 조명처럼 햇살이 드는 곳 나무 사이에 매단 해먹에 누웠다. 몸이 흔들리며 좋다, 하는 것도 잠깐. 스르륵 눈이 감기고 정말로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4∼12월 치유의 숲에서 진행되는 산림 치유 프로그램은 아토피 환자, 만성 질환자나 회복기 환자, 스트레스 많은 직장인, 기력 떨어진 노인, 임신 부부, 청소년 등 대상을 세분화해 이뤄진다. 아토피 환자는 뛰어놀거나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린 뒤 호흡이나 요가 명상을 하고, 편백 비누나 마사지 오일, 연고를 만드는 식이다. 요즘은 직장인들의 참여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참가자 규모와 특성에 따라 진행되므로 반드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지도사의 재량에 따라, 날씨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유아 숲 체험과 숲 해설 프로그램이 별도로 운영된다.
◇ 산책인 듯 등산인 듯 걷는 '말레길'
우드랜드에서 억불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말레길에 들어섰다. '말레'는 장흥 지역에서 쓰는 사투리로 큰 마루인 '대청'을 뜻한다고 한다. 말레길은 총연장 3.8㎞가 계단 없는 데크 길로 이어져, 휠체어나 유모차와 함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서는 데크 길을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산은 산인지라 실제 휠체어나 유모차를 밀고 오르기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릎에 느껴지는 통증이나 부담은 훨씬 덜하기 때문에 노약자나 어린이도 등정에 도전해 볼 만하다. 슬렁슬렁 산책으로 시작해 장흥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한숨을 돌리고, 가파른 곳에서는 잠시만 가쁜 숨을 고르고 나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평소 등산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일지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서면 시선은 멀리 남해에 가 닿는다. 바다 왼쪽으로는 섬처럼 튀어나온 고흥 땅과 득량도, 소록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완도가 눈에 들어온다. 발아래 편백숲은 여전히 푸르지만, 그 산 아래 들판은 부지런히 익은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저물어가는 가을 해가 빽빽한 편백 사이로 비껴드는 장면을 마주하고는, 발걸음도 숨도 다시 잠시 멈췄다.
온종일 숲을 쏘다니다 피곤하면 편백소금찜질방에 들러도 좋겠다. 편백톱밥효소찜질, 편백반신욕도 체험할 수 있다. 그대로 숲속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구들을 들인 전통한옥부터 황토집, 통나무집 등 친환경적으로 지은 20여 동의 숙소가 우드랜드 곳곳에 흩어져 있다. 4인실부터 25인실까지 다양한데, 4인실이나 6인실은 평일에도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다.
숲을 나가는 길에는 매표소 인근의 목공예센터 전시판매장과 공방, 목재산업지원센터 등에서 편백을 비롯한 다양한 목재로 만든 가구와 생활용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