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끄지 잔혹살인 '진상규명' 쟁점 부상…코너몰린 사우디(종합)

입력 2018-10-18 16:58  

카슈끄지 잔혹살인 '진상규명' 쟁점 부상…코너몰린 사우디(종합)
고문·참수 후 두시간만에 시신처리까지…살해상황 묘사한 녹취 일제 보도
사우디 측 설명과 배치…사우디 두둔하며 '對이란 전선' 공들이던 美도 곤혹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 터키에서 행방불명된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끔찍한 살해 당시 상황을 담은 녹취록의 공개로 파문이 더욱 확산하고 있다.
외교 공관 내에서 왕실과 연계된 비밀요원들이 일사천리로 저지른 사건으로 묘사된 만큼 관련설을 부인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던 사우디 정부로서는 코너에 몰린 형국이 됐다.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우방인 사우디를 두둔하며 대(對) 이란 전선 구축과 자국 경제 살리기에 공을 들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동 전략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증거를 내놓으라'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지만, 터키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져 오면서 갈수록 곤혹스러운 상황에 내몰리는 모습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와 터키 친정부 일간 예니샤파크 등은 살해 당시 녹음된 오디오를 청취한 터키 고위 관리의 전언을 통해 끔찍한 사건의 세부 내용을 17일(현지시간) 공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결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지난 2일 오후 1시15분께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총영사관을 찾았다.
무함마드 알오타이비 주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의 사무실로 들어간 카슈끄지는 곧바로 15명으로 구성된 사우디 요원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몇 시간 전에 이스탄불에 도착해 카슈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곧바로 카슈끄지를 구타하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고문을 시작하자, 알오타이비 총영사가 "그건 (내 사무실) 밖에서 하시오. 당신들이 나를 곤경에 몰아넣겠소"라고 하소연하는 대목이 터키 당국이 입수한 오디오에 담겼다.
그러자 암살팀의 한 요원은 "사우디로 돌아갔을 때 살아남고 싶다면 조용히 해!"라고 위협했다.
이들이 카슈끄지를 참수 살해하기까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우디에 비판적인 중동 매체 '미들이스트아이'(MEE)는 살해에 걸린 시간이 7분이었다고 전했다.
15명의 암살팀 중 한 명인 법의학자 살라 무함마드 알투바이지가 나서서 시신을 토막 내고 처리하는 작업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시작한 알투바이지는 동료들에게도 음악을 들으면서 하라고 권고했다.
알투바이지는 사우디 내무부와 왕립의과대학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고위 인사이며, 나머지 암살조원 중 최소 4명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개인 경호원 등으로 확인됐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심지어 이들이 이스탄불로 이동할 때 타고 온 2대의 걸프스트림 제트기는 작년 사우디 정부가 인수한 항공회사 소속이다.
이런 사실은 '카슈끄지가 살아서 멀쩡히 총영사관을 떠났다'는 지금까지의 사우디 측 해명은 물론 사우디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것이라고 외신들이 미리 전한 '자국 정보기관원이 심문 도중 실수로 카슈끄지를 죽게 했으며 왕실과는 무관하다'는 공식 보고서 내용과도 배치된다.

트럼프 행정부에도 불똥이 튀기는 마찬가지다. 살해 장면을 묘사한 녹취록은 중동에 급파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거쳐 터키에 도착한 당일이자, 트럼프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와 통화하고 사우디 정부를 두둔하는 식의 인터뷰를 한 지 하루 뒤 공개됐기 때문이다.
특히 11월 대이란 원유제재를 복원하는 미국으로서는 이란 압박은 물론 제재 후 유가 안정을 위해서라도 사우디와의 공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여서 사우디 정부가 언론인 잔혹 살해를 지휘했다는 정황 공개가 더욱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 정부에 오디오 또는 비디오 증거의 사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히면서도 "만약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도 존재하기는 할 것"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사우디 정부가 거액을 들여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기로 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우디와의 동맹 관계에 힘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터키 수사당국의 진상 규명 작업이 속도를 내면서 사우디와 미국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터키 경찰 과학수사대(CSI)는 이날 저녁 사우디 총영사관에 이어 역시 이스탄불에 있는 총영사관저와 외교 차량에 대한 2차 수색에 나섰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경찰은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카슈끄지의 시신이 영사관저로 옮겨져 처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 들어간 지 2시간 후 외교번호를 단 검은색 밴 등 총영사관 차량 여러 대가 영사관저로 이동했다는 감시 카메라 영상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MEE는 카슈끄지가 영사관저 정원에 매장됐다고 보도했다.
과거 빈 살만 왕세자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남성이 카슈끄지 실종 직전에 사우디 총영사관으로 걸어 들어가는 영상까지 18일 터키의 친정부 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복수의 터키 정부 관리들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이미 미국과 사우디에 오디오 녹음을 전달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과 상반된 이야기를 내놓기도 했다.
또한, 카슈끄지 살해 증거인 오디오 녹취본 등 민감한 자료들이 터키 정부의 승인 없이는 언론에 공개될 수 없다는 점에서 터키 당국의 역할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정부의 엄중한 통제를 받는 터키 언론매체들은 정부가 직접 소유하거나 친정부 기업가들이 소유하고 있어서다.

터키뿐만 아니라 미국 정보당국도 빈 살만 왕세자가 암살 배후에 있을 것으로 의심하는 것으로 전해져 이번 사건을 '독자적 킬러'(rogue killer)의 소행이라고 공언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더욱 곤란해질 것으로 보인다.
NYT에 따르면 미 정보기관들은 아직 빈 살만 왕세자의 개입을 입증할 직접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정황증거들로 볼 때 왕세자 모르게 작전이 진행됐을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 정부의 연루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국제사회로부터의 역풍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날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은 오는 23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 투자회의인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FII)에 불참하기로 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 행사를 통해 세계 금융계와 재계 거물급을 한자리에 모아 개혁 비전을 설명하고 투자를 유치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카슈끄지 사태의 여파로 김용 세계은행 총재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 주요 인사들이 잇따라 불참을 통보하고 있다.
firstcircl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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