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앨범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방법' 발매
오혁·어반자카파·넉살 등 참여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1986년 스물네살 동갑내기 청년이 있었다. 고려대생 김종진은 역사 교사를 꿈꿨고, 서강대생 전태관은 대기업 입사를 염두에 뒀다. 그러나 음악을 향한 꿈이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86년 고(故) 김현식 백밴드로 프로 뮤지션 길에 들어섰다. 1988년 1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로 데뷔한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이야기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이 밴드가 1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올댓재즈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암 투병 중인 전태관(56) 대신 취재진 앞에 홀로 선 김종진(56)은 "노안이 와서 안경 좀 벗고 진행하겠다"며 웃어 보였다.
밴드 마지막 정규앨범은 2008년 발매한 8집. 30주년을 기념해 정규앨범을 만들고 싶었지만 전태관의 건강이 허락지 않았다. 전태관은 2012년 신장암으로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으며 2014년 어깨에도 암이 발견돼 다시 수술했다. 그 와중에 지난 4월 전태관 부인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 더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전태관 근황을 묻자 김종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둘이 음악을 시작할 때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만들었는데, 그중에 '대중 앞에서 결코 추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가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추하다는 단어가 적절치 않지만, 전태관 씨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6년 전 신장암이 시작됐고 2년 전 어깨뼈로 전이됐습니다. 이후 암이 뇌, 두피, 척추뼈, 골반으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암세포와 잘 싸워서 한 번도 지지 않고 100전 100승 했습니다. 한 달 전, 인공관절로 바꾼 어깨뼈 옆에 암이 전이돼 다시 수술해야 하는데 (의료진이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하지 못했어요. 주변에 암 환자가 있는 분이라면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그때 이후로 아직 퇴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겨낼 거라 믿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과 동료 뮤지션들은 30주년을 기념해 트리뷰트 앨범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방법'을 제작했다.
메이크어스엔터테인먼트가 지휘봉을 잡고 혁오, 어반자카파, 윤도현, 데이식스, 십센치, 대니정, 이루마, 장기하, 윤종신, 스윗소로우 등 뮤지션과 배우 황정민이 참여해 봄여름가을겨울 1집부터 8집까지 수록곡을 리메이크했다.
앨범에는 캠페인송 '땡큐송'(Thank you song)과 후배들이 재해석한 9곡까지 총 10곡이 수록됐다. 19일부터 싱글 형태로 한 곡씩 공개하며, 실물 형태 앨범은 12월 중순 발매 예정이다. 수익금은 전태관에게 전달된다.
김종진은 '땡큐송'을 설명하며 '친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지혜의 글을 소개했다.
뮤지션 밥 말리(모두가 너를 힘들게 할 거야, 그게 진실이고 넌 그럴 가치가 있는 놈 하나만 찾으면 돼), 로마시인 플루타르크(내가 끄덕일 때 같이 끄덕이는 친구는 필요 없다. 그런 건 그림자가 더 잘한다), 철학자 에머슨(오랜 친구들이 주는 축복 중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일 때 바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 너바나 커트 코베인(친구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원수에 불과하다)의 말이었다.
"지난 4월 전태관 씨 부인의 장례식장에 놀랄 만큼 많은 동료 뮤지션이 와줬습니다. 음악으로 돕겠다고 했고, 너도나도 참여하겠다고 해 싸움이 날 정도였습니다. 전 사실 2000년대 들어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봤어요. 뮤지션들이 화려하게 사는 걸 목적으로 음악하는 건가 싶었지요. 그게 허물어졌습니다. 헌정 음반에 참여해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날 선공개한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오면'은 밴드 혁오의 오혁·김일우와 미국 여성 싱어송라이터 제이 마리가 함께 편곡했다. 봄여름가을겨울 정규 2집 수록곡을 1980년대 후반 미국 동부에서 유행한 R&B 힙합, 1990년대 초 미국 서부에서 유행한 뉴 잭 스윙 두 가지 버전으로 재해석했다.
혁오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데뷔한 1980년대 후반 유행한 음악을 지금 세대에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 가수를 섭외한 건, 미국 여성 가수가 한국어로 부른 코러스가 들어간 봄여름가을겨울 3집 수록곡 '10년 전 이야기를 꺼내어'를 오마주한 것이다.
김종진은 "데뷔할 때만 해도 외국인이 순 한국말로 노래하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세상이 많이 변했다"며 "그동안 한국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대중음악가들이 자랑스럽다"고 감사를 전했다.
김종진은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동안 세운 목표는 다 이뤘다고 했다. 1만명짜리 공연장에 서기, 당시 제일 좋은 차였던 그랜저 타고 한 손으론 핸들 돌리며 들어가 보기와 같은 호기 넘치는 목표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나 못 이룬 게 백발이 성성해도 무대 위에서 섹시한 뮤지션으로 남자, 그리고 무대 위에서 죽자 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그것도 이루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딛는 모든 땅이 무대가 됐으니까, 어디서든 음악하다 떠나면 약속을 지키는 거라 생각한다"고 힘줘 말했다.
팬들에게 감사도 전했다. '조공'이라는 말도 없던 그 시절, 공연이 끝나면 팬들은 종이학을 접어 보내며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김종진은 "그땐 못되게도 다 돌려보냈다. 팬클럽이 만들어졌을 땐 없애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며 "다시 한번 뭉쳤으면 좋겠다. 음악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간담회를 매듭지을 무렵, 김종진에게 전태관은 어떤 친구냐는 질문이 나왔다. 전태관은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 앞에서 바보가 되지 못했어요. 같이 사업도 했고 최고의 음악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들이었고, 친구끼리도 경쟁하거든요. 하지만 4년여 함께 연주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는 '바보같은 친구'를 실천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엄청 배우기도 합니다. 이 친구가 서강대 경영학과 출신이라 회사 경영과 회계를 담당했는데 제가 이어받았거든요. 선생님, 아버지 같은 느낌도 들어요."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서는 날이라 노래를 준비했다는 김종진. 그는 반주 없이 마이크를 잡고 '외로운 사람들'을 조용히 선사했다.
'우리는 서로가 외로운 사람들/ 어쩌다 어렵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린 사랑을 하네'
cla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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