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용 되어 나라 지키겠다던 王의 발자취
(경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사후 해변에서 200여m 떨어진 바다 가운데 바위에 묻혔다. 죽은 뒤에도 해룡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함이었다.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해 아들 신문왕 때 완성된 감은사(感恩寺) 역시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막기 위해 건축됐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문무왕의 흔적을 찾아가 봤다.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유언으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 세속에 전하기를 왕이 변해 용이 되었다고 하므로, 그 바위를 가리켜서 대왕석(大王石)이라고 한다."(삼국사기 중)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626~681)의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김춘추, 603∼661)과 문명왕후(김보희, 김유신의 여동생)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당나라에 갔을 때 고종으로부터 관작을 받았고, 660년 당 태종이 백제를 평정할 때는 종군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무열왕 사후 그는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문무왕은 왜구의 잦은 침략에 맞서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절을 짓기 시작했고, 죽어서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바다 가운데 큰 바위에 묻혔다.
경북 경주 양북면에는 문무왕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유적들이 있다.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과 인근의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이견대(利見臺)가 바로 그것이다.
◇ 왜구 침입로에 세운 호국사찰
호국사찰 감은사는 문무왕이 짓기 시작해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 완성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감은사란 이름을 붙였다. 현재 감은사지(사적 제31호)는 동해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대종천을 500m 정도 거슬러 올라 오른편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토함산 등지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대종천에 모여 동해로 흘러든다. 천변 도로에서는 야트막하고 평평한 언덕 위에 석탑 2개가 마주하고 있는 감은사지의 고즈넉한 풍경이 건너다보인다.
감은사지가 있는 언덕 아래에는 연못이 감싼 사각 데크가 있고 대종천 방향으로 논이 펼쳐져 있다. 데크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떠받치고 있는데 이곳은 신라 시대 선착장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당시 감은사 바로 앞으로 물길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가 이곳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 물길이 경주까지 이어지며 왜구가 주요 침입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물길을 통하면 신라의 수도까지 가장 빨리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지런하게 쌓은 석축 곳곳에는 못의 머리와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돌이 돌출돼 있다. 신라 시대에 석축을 쌓는 데 사용한 '돌 못'이다.
김순덕 문화관광해설사는 "돌 못은 쌓은 석축이 뒤틀리거나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커다란 돌을 길게 다듬고 한쪽을 못 머리 모양으로 제작한 신라 시대의 독특한 석축 부재로 경주의 석굴암, 불국사, 월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용 드나들게 설계한 금당 지하공간
선착장 추정지를 뒤로하고 언덕의 계단을 오르면 파랗게 풀이 돋은 평지에 석탑 2개만 남은 감은사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방문객들은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감은사의 구조를 보면 중문(中門, 천왕문), 금당(金堂, 법당), 강당(講堂, 설법하던 곳)이 일직선 위에 있고, 금당 앞으로 좌우에는 같은 형태와 크기의 삼층석탑 2기가 서 있다. 중문에서 시작된 회랑(回廊)이 강당까지 사각으로 연결되고, 중간에 있는 금당은 익랑(翼廊, 좌·우측에 잇대서 지은 행랑)을 통해 회랑과 이어진다. 가람의 크기는 남북 74m, 동서 76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현재 회랑 자리에는 둥그런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어 당시의 모습을 가늠하게 한다. 감은사는 쌍탑일금당의 가람 배치로 이후 불국사를 비롯한 통일신라 사찰의 표준이 됐다. 이전까지 불교 사찰의 가람 배치는 금당이 3개에 탑이 하나 있는 일탑삼금당 구조였다.
중문 왼쪽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회랑의 기단석을 따라가면 끝부분에 한옥의 추녀처럼 모퉁이 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린 석재가 남아 있다. 김순덕 해설사는 "당시 최고의 석공이 만들었을 이 모퉁이 돌을 보면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감은사에서 시작된 이 석조 기법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에도 사용됐다"고 말했다.
중문 뒤편에 있는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었다. 금당 터는 지면보다 1m 정도 올라가 있는데 이곳에는 바닥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석조 부재가 가득하다. 띄엄띄엄 놓은 받침돌 위에 남북으로 기다란 장대석을 놓고 다시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을 놓아 바닥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한 사각형의 주춧돌을 놓았다. 금당 바닥 맨 아래에 높이 약 60㎝ 정도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금당 바닥 동쪽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둥그런 구멍이 있는데 이는 용혈(龍穴, 용이 드나드는 구멍)로 추정된다.
김순덕 해설사는 "금당 바닥의 빈 곳과 용혈은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진다"며 "바닥이 비어 있는 구조는 사찰 건물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금당 앞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들이 놓여 있다. 기다란 석재를 보면 톱날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 태극 문양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는 정교하게 제작한 기다란 육각 석재도 있다. 감은사지 동쪽 뒤편에도 감은사지에서 출토된 많은 석재가 전시돼 눈길을 끈다.
◇ 아름다운 사리장엄구 발견된 조립식 석탑
금당 앞 삼층석탑 2기(국보 제112호)는 모두 높이가 13.4m로 구조와 규모가 같다.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10.6m)·다보탑(10.3m)보다 크다. 그만큼 웅장해 보인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을 석재로 조립해 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탑은 상하 2층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가장 아래 쌓은 돌)과 면석(측면의 사각형 돌)이 하나로 연결된 석재 12개로 구성돼 있다. 하층 기단을 덮은 갑석도 12장이다. 상층 기단은 12장의 석재로 조립돼 있다. 이런 이중 기단 형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이 됐다고 한다. 하층 기단의 갑석에서는 둥그런 구멍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돌을 문지르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층 탑신을 보면 우주(모서리 기둥)와 면석을 따로 세웠고, 2층 탑신은 우주를 조각한 판석 4개를 사용했으며, 3층 탑신은 하나의 돌로 제작돼 있다. 3층 탑신이 돌 하나로 제작된 것은 그 안에 사리장엄구를 넣었기 때문이다. 또 탑의 모든 지붕돌과 옥개받침은 각각 4개의 석재로 조립돼 있다. 3층 지붕돌 위를 보면 쇠로 만든 나비장이 돌과 돌을 가로로 붙들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상륜부는 쇠로 된 찰주(탑의 중심기둥)가 노반석을 관통해 탑신에 꽂혀 있다. 찰주의 전체 길이는 약 4.8m로 3.5m가 바깥으로 돌출돼 있고, 나머지는 3층 탑신까지 들어가 고정돼 있다. 탑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찰주 장식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두 탑의 3층 탑신에서는 각각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사리장엄구(사리를 봉안하는 장치)가 발견됐다. 이 중 사자상과 신장상, 공양보살상이 양각돼 있고 금으로 도금된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5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불교 공예품의 백미로 꼽힌다. 구조는 비슷하지만 문양이나 빛깔이 다른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366호)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 갈매기 노니는 문무왕 안식처
감은사지를 빠져나와 대본삼거리를 지나면 '新羅 東海口'(신라 동해구)라고 적힌 비석이 나타난다. 이곳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대종천이 바다와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동해의 입 같은 곳이다. 용이 된 문무왕은 이곳 동해의 입을 통해 감은사를 드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동해구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용처럼 느껴진다.
동해구 비석이 있는 언덕 바로 인근에는 이견대(利見臺)가 자리한다. 이견대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지금 이곳에서는 문무대왕이 묻힌 대왕암이 또렷하게 건너다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이견대가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이라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문왕, 혜공왕, 경문왕이 문무왕의 영혼을 위해 이견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周易)의 '대인을 보면 이롭다'(利見大人)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문무대왕릉은 동해구와 이어지는 봉길대왕암해변에서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다. 무심코 보면 갈매기들이 쉬며 노니는 바닷가의 이름 모를 바위섬쯤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곳에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이 잠들어 있다. 해변에는 문무대왕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다. 대왕암에는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가 있는데 바닷물이 동쪽 수로를 통해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수면 바로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넓적한 돌이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화장된 유골이 안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은 평소 지의법사에게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고 했다. 법사가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묻자 문무왕은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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