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출간…에코 "저널리즘, 가짜·조작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야"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거장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마지막 소설 '제0호'가 국내에서 출간됐다.
출판사 열린책들은 애초 그가 타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설을 출간할 계획이었으나, 번역 작업에 시간이 걸려 독자들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그만큼 이 책을 만나는 독자들의 반가움도 클 듯하다.
작가이자 기호학자로서 인간의 언어와 문자, 소통 방식, 그 행간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의미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준 그는 이 소설에서 현대사회의 정보 전달 기능 최전선에 있는 '저널리즘'을 해부했다.
특히 '정론'이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돈벌이나 정치적인 거래를 목적으로 뉴스를 선택하고 조작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메커니즘을 생생하게 그리며 그 천태만상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그 와중에 음모론에 쉽게 빠져드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며 저널리즘이 어떻게 '가짜'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 배경은 1992년.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전무후무한 정치 스캔들이 터지며 기득권층의 정경유착 실태가 드러난 때다. 그 혼돈에서 밀라노의 부유한 기업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새로운 기수로 떠오르고, 이듬해 자기 정당을 세운 뒤 1994년 총리로 선출된다.
소설에서는 그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그를 암시하는 인물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란 인물을 그림자로 등장시킨다. 그는 야심만만한 기업가로, 지방 TV 채널을 소유하고 잡지 몇 개를 발행하며 힘을 길렀다. 그는 정·재계 거물들의 성역 중심으로 진입하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럴듯한 신문을 창간해 지렛대로 삼으려 한다. '도마니'(내일)란 이름의 신문 창간 준비호에 거물들을 떨게 할 만한 내용을 실어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메이저 성역에 들어가는 티켓을 받겠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이 신문 창간 계획을 접고, 유력 일간지나 은행 주식 일부를 받겠다는 것이다.
소설 주인공 '콜론나'는 이름 없는 작가로 전전하다 '도마니' 주필 '시메이'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시메이는 이 신문이 왜 창간 준비호 '제0호'를 시리즈로 발행하게 됐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며 신문이 창간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자신이 돈벌이를 위한 책을 낼 거라고 말한다. 저널리즘의 모범을 구현하려다 결국 외부 상황으로 실패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윤색해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시메이는 글재주가 있는 콜론나에게 그 책을 대신 써달라고 요구하며, 기록자이자 관찰자로서 콜론나에게 '도마니'의 데스크(기사를 검토·수정하는 역할)를 맡긴다.
이렇게 도마니 '제0호'는 제작 의도부터 불순하다. 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 천재적인 시메이는 저널리즘을 운운하면서도 실상은 기자들에게 눈에 띄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라 하고, 기득권층 이익에 반하는 기사는 쓰지 말라고 한다.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면박을 준다.
"그건 테러리즘이나 다름이 없어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나 석유나 우리나라의 철강업을 문제 삼고 싶어요? 우리 신문은 녹색당의 기관지가 아니에요. 우리 독자들은 경고를 받을 게 아니라 안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106쪽)
그 와중에 도마니 기자 '브라가도초'는 무솔리니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을 바탕으로 교황, 정치가, 은행, 마피아 등 유력자들이 얽힌 폭로 기사를 준비하는데, 어느 날 등에 칼을 맞고 살해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한 뒤 언론과 인터뷰에서 "나는 40년 넘게 저널리즘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해 계속 생각하고 토론해 왔다", "소설에서 들려주는 것은 저널리즘 정보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저널리스트들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나쁜 경우를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또 음모론에 관해 "가짜는 나를 매혹한다.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도 기호 행위의 특징이고,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도 기호 행위의 특징이다"라며 거짓에 이끌리는 인간의 속성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음모론은 우리를 책임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음모는 사회의 편집증이 된다"고 지적했다. 또 '비판적인 저널리즘은 음모론을 해체하는 데 기여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그렇다. 저널리즘은 가짜와 조작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소설은 인문학 지식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전작들에 비교해 훨씬 쉬운 내용과 문체로 쓰였다. 초반 몇 장을 넘기면 이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렇게 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이가 들면 더 현명해지는 법이죠. 자기가 알 것은 다 안다는 식으로 무게를 잡을 필요가 없어요. '제0호'는 내 소설들 가운데 학식을 가장 적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전 소설들이 말러의 교향곡들이라면, 이 소설은 재즈에 더 가깝죠. 찰리 파커나 베니 굿맨의 연주를 듣는 것과 같아요. 내 소설들에서 문체는 언제나 주제를 따라갑니다. '장미의 이름'의 문체는 중세 연대기 작가의 문체였어요. '전날의 섬'의 문체는 바로크였고요. '제0호'는 아주 건조한 저널리스트의 문체를 취합니다. 나는 동시대성에 관해 말하기 때문에 온갖 역사적 문헌을 중첩할 필요가 없었어요."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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