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훼손되는 항일투쟁의 흔적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 해외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연해주·동북3성 항일독립 유적지 한민족순례'에 동행해 독립운동 흔적을 살펴보고 그곳에 사는 후손들을 만났다.
러시아 극동 지역부터 중국 옌볜(延邊), 북한과 러시아·중국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두만강, 압록강 줄기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 기념탑만 외로이…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신한촌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인기 여행지로 떠올랐다.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이면 닿는 곳에서 이국적인 유럽 정취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어서다.
모스크바에서부터 이어지는 총 길이 9천288㎞ 시베리아 횡단철도 종점인 이곳은 한민족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땅이다.
연해주는 3.1운동 이전부터 수많은 의병과 독립지사들이 망명해 항일투쟁을 펼친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10년대 연해주 항일투쟁의 구심점은 당시 가장 큰 한인 주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자리 잡은 신한촌(新韓村)이었다.
한때 1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이 모였지만 지금은 한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기념탑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22일 찾은 신한촌에는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 낮은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기념탑은 각각 대한민국, 북한, 재외동포를 상징하는 높이 3.5m가량의 대리석 기둥 세 개와 조선 팔도를 의미하는 작은 돌 8개로 조성됐다.
1999년 3.1운동 60주년을 기념해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세운 기념탑은 철제 울타리로 주변이 둘려 있다.
자꾸 훼손되는 탑을 보존하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평소에는 자물쇠까지 채워 출입을 막고 있다.
철제 울타리에 묶인 태극기와 천띠 몇 개가 바람이 나부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신한촌 주변 거리 이름은 예전에는 '서울 거리'라는 뜻의 '서울스카야'였다. 지금은 러시아 영웅 이름을 딴 '하바로프스카야'다.
◇ 최재형·이상설 혼이 깃든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와 더불어 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역할을 한 도시가 우수리스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 약 100㎞ 거리인 이 도시는 과거 발해의 5경 15부 중 하나인 솔빈부가 있던 곳으로, 헤이그 특사이자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 이상설이 활동한 무대였다.
1917년 순국한 그는 임종 전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라며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눈을 감은 그의 유해는 재가 돼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에 뿌려졌다.
수이푼 강변에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운 이상설 유허비가 덩그러니 서 있다.
23일 유허비 앞으로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광활한 초원 너머로 옛 발해 산성이 보였다.
우수리스크에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흔적도 남아있다.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거부가 된 후 학교를 짓고 신문을 발행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했다.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그가 마지막으로 거주한 집이 있다.
러시아인 소유였던 집을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사들였다.
리모델링 공사 막바지 단계로 아직 유품과 사료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독립지사들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밤 연해주 일대 고려인 밀집 지역을 습격했다. 이른바 '4월참변'이다.
최재형은 집에서 멀지 않은 왕바실재 언덕에서 체포돼 이튿날 처형당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포장길을 걸어 올라가 처형 장소로 알려진 언덕에 닿았다. 기념비나 안내판조차 없었다.
저 멀리 대형 송전탑과 전봇대가 서 있고 언덕에 오르는 도중에는 러시아인들의 차고가 눈에 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인 소강석 목사가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자, 옆에 서 있던 고려인 최 나젤르다(83) 씨가 또렷한 한국어로 노래를 시작했다.
◇ '12인을 기억하다'…안중근 단지동맹비
최재형은 안중근과도 인연이 깊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뒤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1908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운동단체 동의회를 결성한다. 최재형이 총장을 맡았으며, 안중근도 참여했다.
안중근은 이듬해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혈서를 쓰며 '단지동맹'을 한다.
이들은 최재형 지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최재형 집이다.
최재형은 변호사를 선임해 안중근을 살리려 했으나 재판이 러시아에서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수리스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 거리의 크라스키노시 외곽에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다.
인근 해변 습지대에 발해성터가 남아있는 크라스키노 지역은 동의회가 훈련하고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다.
높이 4m 정도 큰 비석에는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 높이 1m 정도 작은 비석에는 '200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고 쓰여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만큼 단지동맹 기념비도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 이곳에 왔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처음으로 기념비를 세웠으나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이 훼손하는 사례가 잦았다.
이후 비석을 옮긴 지역은 국경지대로 편입돼 러시아 보안당국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돼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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