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프랑스에 잠든 '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차남 장자크씨

입력 2018-10-30 06:10  

[인터뷰] 프랑스에 잠든 '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차남 장자크씨
성에 남아있는 '푸안', 부친이 일제의 추적 피하려고 위장한 중국식 성
佛 브르타뉴서 정치인·기업가로 성공…"늦었지만, 부친 공적 제대로 평가됐으면"
"엄했던 부친, 프랑스서 딸들이 번 돈까지 긁어모아 독립운동 자금 보태"
"나치 점령 겪은 우리 가족, 부친이 한국서 일제에 저항한 것 온전히 이해"



(생브리외[프랑스]=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지금이라도 꼭 제대로 평가됐으면 합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생브리외의 자택에서 만난 한인 2세 장자크 홍 푸안(76)씨는 한인 동포들의 도움으로 아버지 홍재하(1898∼1960)의 유품인 수백 장에 달하는 서신과 기록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의 부친 홍재하는 100년 전 프랑스로 이주한 재불동포 1세대 한인 35명 중 한 명으로,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도왔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동안 해방 이후 삶의 궤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역사 속에 묻혀 있었지만, 장자크 씨가 몇 년 전 알게 된 한인부부 김성영씨(렌 경영대 교수)와 송은혜씨(렌2대 음악학과 강사)의 도움으로 부친 홍재하는 그동안 쌓인 더께를 털어내고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중이다.
장자크 씨는 파리에서 엄격한 부친과 프랑스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영국 유학을 거쳐 파리에서 자동차 관련 기업을 경영하다가 30여 년 전 생브리외에 정착했다.
한국으로 치면 시의회 의장까지 지낸 성공한 정치인 겸 기업가로, 현재 유망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앤젤 투자자로서 지역 사회에 명망이 높다고 한다.
그의 성(姓)에 남아있는 '푸안'은 부친 홍재하가 러시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인으로 위장하려고 쓴 것으로, 그는 지금도 이 성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외모상 여느 프랑스 노인처럼 보이는 장자크 씨는 1980년엔 한 세계적인 보험사의 도쿄지사장에 내정되기도 했지만, 한국계라는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채용이 취소되는 곡절도 겪었다고.
그는 아버지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은 한국에 서운한 점도 많고 본인이 한국어도 할 줄 모르지만, 자신이 언제나 독립투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장자크 씨는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이 지금이라도 인정되고, 생전에 그렇게 바라시던 고국행이 이뤄진다면 여한이 없겠다"면서 끝내 눈물을 떨궜다.
다음은 장자크 홍 푸안 씨와의 문답.
--부친이 어떻게 프랑스에 정착하신 건가.
▲1919년쯤 프랑스에 처음 오신 것으로 안다. 초기엔 파리에서 집사를 했다. 그땐 부유층이 아시아인 집사를 두는 게 유행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인 사업가 집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다른 집 관리인으로 일하던 프랑스인 여성, 즉 내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2남 3녀를 뒀다. 주인인 미국인 사업가가 귀국하면서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 부친은 오로지 해방되면 고국에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어서 그 제안을 뿌리쳤다.
--부친은 무슨 일을 했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집사를 거쳐 나중에는 항공기 부품회사, 전자회사 일렉트로룩스에서도 일했는데, 처음엔 아시아인이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이 성실함과 좋은 머리를 인정해 조금씩 큰 책임을 맡겼다.
--어떤 분이셨나.
▲굉장히 엄하셨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한국이 해방되면 우리 가족은 언제라도 곧바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가서 배우면 된다"고만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한국어를 못한다.
부친은 항상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셨고 고국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다. 그렇게 번 돈을 계속 어딘가로 보냈는데, 그게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누나들이 성인이 되고 취직하자 그 돈의 일부도 한국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우린 항상 가난했다.(웃음)
아버지는 파리에 들르는 한국 손님을 모두 우리 집에서 재웠다. 독립운동가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간 분들이 감사편지도 많이 보냈다.
--본인 이름 장자크 홍 푸안(Jean Jacques Hong Fuan)인데, '푸안'은 중국 성 아닌가.
▲부친이 한국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일제에 적발돼 체포를 피하려고 고국을 뜬 것으로 안다. 신분을 숨기려고 상하이 출신 중국인이라고 꾸미고 '푸안'이라는 성을 썼다고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 와서는 다시 원래 성 '홍'을 썼는데 1942년 또 푸안으로 바꿨다.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됐는데, 일본과 독일이 한통속이기에 일제에 발각될까 봐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내 성에도 '푸안'이 남아있다.
우리 가족들은 나치의 압제에 놓인 프랑스를 겪었다. 그때야 아버지가 일제를 피해 프랑스까지 오고 그렇게도 조국 독립을 바라던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본인은 한국 이름이 있나.
▲아버지가 '영종'이라고 나를 불렀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문서에는 그의 한국 이름이 '종작'이라고 나왔다. 그의 형 장르네(작고)의 한국 이름이 '종령'이었다고. 기억의 혼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독립운동가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기록물들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잘 모아뒀다. 아직 자료를 계속 살펴봐야 하고 나도 그 의미를 잘 모르지만, 도와주는 한국 친구들(김성영·송은혜씨 부부) 얘기를 들어보면, 1919∼20년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한국인사들과 나눈 서신이나 나중에 장면 총리 등과 주고받은 편지도 있다고 한다.
한국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독립운동의 상황에 관한 얘기가 많고 일제 때는 아버지가 한국의 상황을 여기저기에 많이 알리신 것 같다. 한국전쟁이 나고는 구호물품 조달에 관심을 기울여서 국제적십자에 편지도 보낸 것 같다. 주불 미국대사관에 전쟁 때 아버지가 원조를 요청한 편지도 있다.
기록을 보니 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하시다가 얼굴이 알려져 피신하려고 외국으로 나온 것 같다. 1917년 러시아군으로 참전한다는 증서도 있더라. 학자들의 조사가 더 필요할 거다.
--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나.
▲한국에 전쟁이 났을 때 매우 힘들어하셨다. 해방 후 뜻대로 귀국하지 못해 힘들어하셨는데, 한국에 전쟁까지 나자 거의 말수가 없어졌다. 그래도 전쟁구호 활동을 시작하신 것 같다. 1959년 암에 걸리셨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지금 파리 근교 묘지에 묻혀 있다.
--본인은 한국에는 가봤나.
▲1970년에 처음 갔다. 그때 한국이 너무 가난했고 판자촌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갈 때마다 한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매우 놀랍다. 대단한 저력이다. 아버지와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게 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그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만큼.
--왜 지금까지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보나.
▲사실 백방으로 노력했다. 2006년 한국의 한 기자가 취재하러 오기로 돼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던 누님이 약속 날짜를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물거품이 됐다.
그 이후 내가 자료들을 물려받았고, 답답한 마음에 한국대사관에도 타진해봤지만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김성영·송은혜 씨 부부를 알게 됐고, 일이 이렇게 진전됐다. 사실 지금도 너무 늦었다. 내 나이 지금 76인데 이제야 부친의 독립운동이 조명되는 거니까. 그래도 늦게라도 인정되면 좋겠다.
--홍재하 선생이 그렇게 귀국을 원했는데,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고 유해를 한국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하면.
▲(※그는 이 질문에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며 한참을 울먹이다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나도 늙었다. 지금도 늦었다. 그러나 고국행은 아버지의 평생의 꿈이었다. 그렇게 되면 여한이 없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오기 전 한국에도 아내와 자녀가 있었다고 하는 데 그 후손도 꼭 찾고 싶다. 아버지가 당신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고, 생전에 그렇게 고국행을 원했지만 결국 못 이루고 프랑스에 묻혔다고 꼭 말하고 싶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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