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심 "효력 있다"→대법 "효력 없다"…청구권협정 따른 권리소멸 주장도 부정
구 일본제철과 신일철주금 법적동일성 인정…"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전웝합의체 판결은 앞서 배상책임을 부정한 일본 법원 판결의 국내 효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낸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소송 사건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일본기업의 배상책임 인정 근거로 "일본 법원의 판결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어긋난다는 원심의 판단은 관련 법리에 비춰 모두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판결의 국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이 쟁점에 대해 1·2심은 "일본법원의 확정판결은 국내에도 효력이 인정돼 우리 법원으로서는 일본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하급심과는 완전히 다른 판단을 내렸다. 당시 이인복·김능환·안대희·박병대 대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1부는 일본 법원이 일본법인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근거로 원고 패소로 판결하기 위해 내세운 각종 전제적 판단들이 우리 헌법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국내 효력을 부인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일본판결의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된 판결임이 분명하다"고 규정했다.
피해자들을 일본인으로 보고 재판에 적용될 준거법으로 외국적 요소를 고려한 국제사법이 아니라 일본법을 적용한 점,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하에 일제의 총동원령과 국민징용령을 유효하다고 평가한 점 등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이 판단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제에서 내린 일본 법원의 판결이 국내에서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러한 대법원 판단은 파기환송심을 거쳐 재상고심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그대로 유지되면서 일본기업에 배상책임을 묻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다.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청구권을 더는 주장할 수 없는지도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이었다.
청구권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3억달러를 무상 제공하고 2억달러의 차관을 주는 대가로 한국 국민이 일본과 일본국민을 상대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등의 청구를 하지 않도록 했다.
다만 이 협정으로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배상청구권까지 제한되는지가 명확하지 않아 해석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1·2심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우리 국민의 일본 및 그 국민에 대한 배상청구권 자체가 소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배상청구권과 청구권협정은 별개라고 판단했다.
청구권협정이 제한한 청구권은 양국 간 합법적 관계에서 발생한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따른 청구권에 한하고,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권 등 불법적 관계에서 발생한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 판단은 2012년 대법원 판결과 파기환송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고,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다수 의견으로 이 판단을 확정했다.
다만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봐야 하므로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이 피해자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지만 소수의견에 그쳤다.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배상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다수의견에 대해서는 "적용대상에 포함되지만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에 불과해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다"는 김소영·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의 별개 의견이 있었다.
강제징용 가해기업인 구(舊) 일본제철이 새로 설립된 신(新)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법적으로 동일한 법인이라고 판단한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1946년 제정된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은 구 일본제철을 해산하고 별개의 법인인 신 일본제철을 설립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일본법원은 이 법을 근거로 신 일본제철을 승계한 신일철주금이 구 일본제철의 배상책임과 상관없는 별도의 기업이라고 인정했다.
우리 법원의 1·2심도 "구 일본제철의 배상책임을 신일철주금이 승계했다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며 일본법원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판단 역시 2012년 대법원 판결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재판부는 "구 일본제철의 자산과 영업, 인력이 신 일본제철에 이전돼 동일한 사업을 계속했으므로 법적으로 동일한 회사로 평가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파기환송심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철주금에 배상책임이 인정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시효완성으로 소멸됐는지도 쟁점으로 다뤄졌다. 2012년 대법원은 "적어도 피해자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시점인 2005년 2월까지는 한국에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파기환송심은 여기에 더해 "가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책임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며 소멸시효 완성 주장 자체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판단 역시 관련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그대로 유지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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