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 드러낸 용산기지…일제강점·해방·분단·냉전 역사 그대로

입력 2018-11-02 19:49   수정 2018-11-02 21:03

속살 드러낸 용산기지…일제강점·해방·분단·냉전 역사 그대로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용산에도 산은 없습니다. 인왕산에서 지맥이 흘러 효창공원 가로질러 마포까지 이어지는 구릉을 보고 선조들이 용산이라 표현한 것이죠."
그렇다. 실제로 본 용산에는 산이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우리 땅이지만 외국 군대에 자리를 내주고 114년간 들어와 볼 수 없었으니 용산이라 부르면서도 그곳에 산이 있는지 없는지 미처 알 수 없었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출입기자들은 2일 미군의 협조를 얻어 참관단과 함께 버스를 타고 용산기지 내부를 둘러봤다.
일제가 1904년 8월 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한 이후 오랜 세월 일본군과 미군의 군사기지로 쓰이는 동안 용산 미군기지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일행은 이날 오후 3시 버스 한 대에 타고 경찰차의 안내를 받으며 기지 내부로 진입했다.
안내를 맡은 김천수 용산문화원 용산문화실장은 "지금은 버스를 타고 가지만 이곳을 걸으면서, 생각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깊이를 되새길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투어는 용산기지 14번 게이트로 들어가 SP벙커(일본군작전센터)→121병원(총독관저터)→위수감옥(일본군 감옥)→주한미군사령부→한미합동군사업무단→일본군 병기지창→남단→드래곤힐호텔 등으로 이동하는 코스로 짜여졌다.
이 중에 위수감옥과 한미합동군사업무단, 남단에서는 일행이 내려서 직접 살펴볼 수 있었고 나머지 시설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봤다.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SP(South Post) 벙커였다.
SP 벙커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방공작전실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6·25 때에는 이곳에서 한강철교 폭파가 결정됐다고 한다.
기지 내부는 병원과 호텔, 학교 등을 제외하고 단층 건물이 배치돼 미국의 한적한 시골 도시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정표는 모두 영어로 쓰여 있었고 가끔씩 '주차금지' 등의 문구만 한글로 돼 있었다.
다소 쌀쌀해진 날씨에도 골프연습장엔 골프 치는 사람들이 보였고 놀이터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COMMISSARRY' 라는 기지 내 식료품점도 보였다. 1980년대에 지어졌을 때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식료품점이었다고 한다. 식료품점의 모습에 소시지나 햄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도 났다.
다만 일부에서는 폐쇄된 건물도 있어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높은 돌벽으로 쌓인 구역이 나타났다. 이곳은 미 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인다고 했다.



이윽고 버스는 첫 번째 방문지인 위수감옥에 도착했다.
빨간 벽돌을 쌓은 외양이 서대문 형무소의 축소판 같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형도 집행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대표 '주먹' 김두한도 이곳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건물에는 과거 6·25 때 난 탄환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김천수 실장은 "용산기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분단, 냉전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라며 "탄환 자국들은 주한미군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보존했다"고 설명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런 건물들에는 여러 시기의 역사가 겹쳐 있다"며 "나중에 이와 같은 건물들을 잘 조사해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용산공원은 국가공원이라 국토부 관할이지만 법에는 서울시와 협의해서 하게 돼 있기에 같이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며 "환경문제 등도 협력해서 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한미합동군사업무단 앞에 하차했다. 깔끔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원래는 일본 육군 장교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했다.
김병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이곳은 한미동맹의 메카"라며 "공원화 작업 때 역사를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좋은 공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행은 이어 남단터도 둘러봤다. 이곳은 과거 조선 조정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은 훼손 방지를 위해 철 그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행사에 참석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곳은 (농경사회인) 조선시대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기우제를 지내면 100% 비가 왔는데, 비가 올 때까지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농담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유 전 청장은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허파가 될 수 있는 녹지공간으로, 군사시설이 아니었으면 아파트가 들어왔을 것"이라며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훌륭한 녹지로 쓸 수 있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이곳은 단순 녹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건물도 산재해 어떤 공원으로 만들 것인지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버스투어를 시작한 것도 시민들이 직접 부지를 보면서 어떤 공원을 만들어 갈지 의견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이곳에 임대주택이나 창업센터 등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된 데 대해 김 장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는 "1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금단의 땅이었던 곳이 이제는 국민들에게 돌아온다는 역사적 의미가 굉장히 크다"며 "서울에 녹지공간이 많지 않으니 공원으로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행은 토미 마이즈 주한미군사령부 기지변혁 재배치단장과 가벼운 담화를 나눴다.
마이즈 단장은 "주한미군은 주둔 시점부터 수십년간 용산의 문화적 가치를 파악하고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청 등과 긴밀히 협력해 왔다"며 "나도 딸의 손을 잡고 훌륭하게 완공된 용산공원에 가 보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군기지 오염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가족과 함께 캠프 험프리에 수년간 살아왔고 환경보호와 건강, 지역사회의 안전 등의 가치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며 "우리는 이곳의 환경을 잘 보살폈다고 생각하며, 기지 반환 절차도 잘 따르겠다"고 답했다.

bana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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