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역학관계 변화 계기될 수도"…"터키, 이슬람권 지도국 부상 부심"
전문가 "에르도안, 무슬림형제단 세력 강화 기회로도 활용"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사건은 한 나라의 언론탄압이나 인권침해 논란을 넘어 중동 전체의 역학적 균형에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될 사안으로 비화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 있는 자국 총영사관으로 암살조를 보내 언론인을 대범하게 살해하고, 시신까지 훼손한 전대미문의 사건에 전세계는 경악했다.
그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사건의 '배후' 또는 '몸통'으로 지목되며 현재까지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받은 인물로 꼽힌다.
'화약고' 중동의 안정과 전세계 에너지 안보를 그러한 '폭군'에 맡길 수 없다는 불안감에 최대 우방인 미국에서 '왕세자 교체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반대로 사건이 벌어진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가장 큰 지정학적 실익을 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의 구현' 명분을 앞세워 무함마드 왕세자를 몰아붙였다.
그는 2일(미국동부 현지시간)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카슈끄지 암살을 지시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서도, "지시는 사우디 정부 최고위층으로부터 왔다"고 밝혀 사실상 왕세자를 겨냥했다.
비영리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중동북아프리카프로그램의 리나 카티브 단장은 3일 AFP통신을 통해 "카슈끄지 피살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사우디를 제치고 터키를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울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진단했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신(新)미국안보센터의 니컬러스 허라스 연구원은 사우디와 터키가 이슬람 세계의 지도국 지위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카슈끄지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이번 사태를 사우디와 이집트 등에서 테러조직으로 지정된 무슬림형제단의 결속을 다지고 세력을 강화하는 기회로도 삼는 것으로 관측됐다.
대표적인 무슬림형제단 지지자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중 집회 때 무슬림형제단을 상징하는 손동작 '라비아'를 자주 썼으며, 작년에는 아예 '정의개발당'(AKP)의 수신호로 채택하기도 했다.
숨진 카슈끄지 역시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 터키프로그램 단장 소네르 차압타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중동에서 그의 정책에 맞선 '3자 연합'을 약화하는 데 카슈끄지 사태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에 대항하는 3자 연합이란 무함마드 왕세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랍에미리트(UAE) 왕세자,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가리킨다.
차압타이 단장은 "이 세 아랍국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무슬림형제단 지지 정책을 놓고 대립했다"면서, "에르도안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취약해졌으므로 (무슬림형제단 세력을 키울) 최적의 기회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지는 미국에 달렸다.
그러한 한계를 잘 아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카슈끄지 사태로 무함마드 왕세자를 압박하면서도 그를 명시적으로 거론해서 저격하지는 않았다.
채텀하우스의 카티브 단장은 "터키는 카슈끄지 사건으로 지정학적 도박을 크게 벌렸고, 지금까지는 능수능란하게 게임을 끌어왔다"면서 "그러나 터키 혼자서는 무함마드 왕세자를 폐위시킬 수 없기에, 공은 미국에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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