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장파 학자가 펴낸 '김일성 이전의 북한'
소련군 참전부터 '격동의 67일' 분석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북한 정부 수립을 주도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공산주의 통일 조선'을 염두에 두고 김일성을 한시적인 지도자로 낙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학설이 나왔다.
러시아 소장파 한반도 전문가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는 최근 발간한 책 '김일성 이전의 북한'에서 "소련이 임시적으로만 김일성을 북조선 지도자로 임명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면서 "만약 신탁통치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거나 미국이 많이 양보해서 좌파·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통일 정부를 승인했다면 소련 측이 김일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일 조선의 지도자로 승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신탁통치를 배제한 남북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북한의 지도자로 승인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런 학설의 증거로 두 가지 사료를 제시한다.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러시아 자료들이라고 출판사 측은 설명했다.
하나는 위관급 소련군 장교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군복을 벗고 조선인 앞에 '민족 영웅'으로 등장한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 이후에 나온 사료다.
이 사료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말렌코프와 소비에트 연방 국방인민위원회 위원 보좌 불가닌 대장, 붉은 육군 총정치국장 시킨 상장에 보내는 보고서다.
보고서는 김일성을 '인민민주 전선을 지도할 만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도 박헌영에 대해서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영도할 가장 준비된 간부'로 평가하고 그를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만일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최종 승인된 상태였다면, 사료의 저자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임명하면 좋겠습니다'라고 서술하는 대신 '스탈린 동지의 명령에 따라 김일성을 지도자로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서술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사료는 1946년 3월 소련이 승인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하려던 '조선 통일 민주 정부' 구성원 목록이다. 이 목록에서 김일성은 군무상(軍務相)에 불과했고 수상은 여운형, 부수상은 김규식이었다.
저자는 책에서 1945년 8월 8일 소련군 참전부터 김일성의 혜성 같은 등장까지 67일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때가 북한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인 이 시기는 그나마 북한 현대사에서 미약하나마 시민사회와 정당이 활동했던 비교적 '격동의 시기'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의미는 김일성 정권 수립 과정을 다룬 이전 논문이나 서적들과 달리 당시 러시아 사료와 김일성을 만난 러시아인, 중국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한 최신 연구 성과라는 점에 있다.
과거 출판된 김일성 관련 서적들의 러시아어 오역을 수정하고, 다양한 연표와 사진, 인물 관계도, 연설문, 보고서 요지 등이 수록된 점도 눈에 띈다.
김일성과 가까웠으며 소련의 북한 지도자 인선 명단에 포함됐다가 후일 숙청된 유성철 등의 증언이 포함된 것도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북조선 지도자 후보를 5개 분류로 나눴는데, 유성철은 허가이 등과 함께 소련 고려인계 몫으로 지도자 후보에 들었다.
김용범 박정애 등이 속한 국제공산당 일꾼,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파 구성원들,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파 지도자, 김일성을 위시한 빨치산 지도자들도 있었다.
김일성의 조선어 실력이 떨어지는 대신 러시아어와 중국어 실력이 좋았다는 증언과 장남 유라(정일), 처 니나(김정숙) 등의 이름이 러시아어로 나오는 대목 등도 흥미롭다.
한울엠플러스 펴냄. 232쪽. 2만5천원.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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