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지나친 관심은 공포가 된다

입력 2018-11-08 14:53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지나친 관심은 공포가 된다
구병모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관심을 쏟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사를 시시콜콜 공유하는 공동체 삶이 과연 좋기만 할까.
소설가 구병모는 단편소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 이런 질문을 흥미로운 이야기에 녹여 보여준다. 낡은 사고방식에 갇힌 집단 공동체가 한 개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그려 보이며, 이웃 사이의 적정한 관심과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상적인 말이 현실에서는 허구에 가까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소설 주인공 '정주'는 만삭의 임산부다. 디자인 일을 하던 회사에서 퇴사 압박이 강해지는 가운데,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이 갑자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발령받는다. 부부는 내키지 않지만, 4년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 시골 분교 근처로 이사한다. 지인들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귀촌 생활을 즐기라고 조언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사 첫날부터 동네 할머니가 불쑥 집 안으로 들어와 집을 구경하겠다고 하고, 부풀어 오른 배를 마음대로 만지며 아들이냐 딸이냐 묻는다. 정주는 무거운 몸으로 이사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이 할머니를 웃는 낯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런 원치 않는 이웃들의 방문은 나날이 이어진다.
지인들이 보낸 출산 선물을 배달하러 택배 기사가 자주 찾아오는데, 그는 집이 너무 오지에 있다며 투덜대고, 마을 어르신들은 '집에서 노는 여자가 뭘 그리 많이 사들이느냐'며 의아해한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데도 온갖 참견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연히 원두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가게 남자주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아니냐며 뒤에서 쑥덕거린다.
정주의 괴로움이 깊어가는 사이, 남편 이완은 동네 유일의 학교 교사라는 이유로 온갖 지역 행사와 잡일에 불려 다니며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온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는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고, 정작 그 순간에는 한참 떨어진 거리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2008년 판타지 청소년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파과',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등 장편에서 환상적인 세계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 실린 단편들과 장편 '네 이웃의 식탁' 등 현실을 날카롭게 재현한 작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번에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등 단편 8편을 묶어 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문학동네 펴냄)을 보면 그런 색채를 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여기 담긴 작품들은 주로 아이를 기르는 여성, 소설을 쓰는 여성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 실존적 불안, 다가올 시대의 윤리 등에 관해 묻고 답한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는 편협한 세계관을 작품 속에 드러냈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작가 'P씨'를 둘러싼 논란을 통해 SNS상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과 '말의 활극'을 실감 나게 그린다. 사회적 존재로서 작가의 역할과 의미, 한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미러리즘'에서는 한 남자가 영문도 모른 채 '주사기 테러'를 당해 생물학적 여성으로 변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 여성들이 사회에서 받는 공격과 차별, 혐오를 꼬집는다.
문학평론가 신샛별은 추천사로 "어느 경우에도 추상이 아니라 구체를, 현상이 아니라 실질을 장악해 그려내는 솜씨는 그의 소설에 긴요한 시의적 의미를 새겨놓는다. (…) 그의 소설이 강력하게 환기하는 것은 공상적 상상력이 아니라 차라리 지금-여기에 이미 와 있는 위협과 공포다"라고 말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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