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례 북한 방문해 현지조사·피해자 인터뷰한 르포작가 김영 씨 강연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1923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도연 할머니는 만 16세 때 '군부대에서 빨래하는 일이 있다'는 순사의 말에 속아 중국 봉천(奉天)으로 끌려갔다. 그곳은 일본군 위안소였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왼팔에 문신을 새겨넣으려는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왼쪽 눈에 총을 맞고 시력을 잃었다. 그제야 위안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돈도 없는 데다 더러운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김 할머니는 해방 후 인근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온 남성과 결혼하고 1957년 북한에서 살기 시작했다.
딸이 있었지만, 김 할머니는 딸과 함께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다. 혹여나 왼팔에 '스미노'라고 새겨진 문신을 딸이 볼까 두려워서다. 그 문신은 당시 위안소 주인의 성(姓) 이었다.
이렇게 꼭꼭 숨겨온 과거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것은 2004년 1월 뇌출혈로 쓰러지고 나서다. 더는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김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것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김 할머니는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조대위)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고 같은 해 6월 만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르포작가 김영 씨는 16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정의기억연대 주최로 열린 정대협 창립 28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북한의 마지막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재일동포인 김씨는 2000년부터 일본군 위안부와 한반도 북부지역의 위안소·유곽 등을 주제로 연구하기 위해 5차례 북한을 방문해 현지를 조사하고, 6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만났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울 때일지라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우선 배급을 하고, 이들이 아플 때 평양에서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김씨는 "북한에서 나름대로 우대를 해주는데도 공개 증언은 물론이고 자신이 피해자였다고 신고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김씨가 파악하고 있는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19명이다. 이 중 몇 명이 살아있고, 몇 명이 숨졌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고 전했다.
다만, 공개 증언에 나선 피해자는 52명이고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확인됐다.
1995년 조대위가 제작해 출간한 90쪽 분량의 책 '짓밟힌 인생의 외침'에는 40명의 피해 사례가 담겼다. 나머지 12명은 김씨가 노동신문 등에 공개된 사례를 일일이 세본 것이다.
북한도 나름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신경을 쏟고 있다. 국제교류를 하지 않다 보니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지만 조대위가 연구도 하고 보고서도 발간하고 있다. 노동신문 역시 관련 기사를 꾸준히 내고있다.
다만 김씨는 노동신문에 드러나는 북한의 시각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신문은 "랍치, 유괴, 강제련행의 방법으로 수많은 녀성들을 성노예로 만들었다", "일본군이 고스란히 놓아주어 살도록 해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와 같이 일본군의 극악무도함을 강조하는 데에만 방점을 두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씨는 "피해자 중에는 일자리가 있다거나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간 사례가 많은데 이들이 유괴·납치된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피해자들은 증언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는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위로하거나, '증언해줘서 고맙다', '대단한 일을 하셨다'고 응원해줄 공감자와 연대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며 "이게 남과 북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run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