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안토니오 파파노 내한공연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1악장을 여는 '운명'의 노크 소리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4악장의 '광명'은 그리 힘들게 찾아오지 않았다. "운명이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 지금 어둡더라도 때가 되면 해가 뜨고 광명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안토니오 파파노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지난 16일 저녁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안토니오 파파노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는 이번 음악회에서 유명한 베토벤의 곡들만 연주했지만, 그들이 선보인 베토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진지하고 심각한 베토벤이 아니었다. 음악회 내내 베토벤이 아닌 로시니의 음악을 듣는 것 같은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음악회를 여는 베토벤 교향곡 2번의 D장조 코드에서부터 베토벤이 쓴 음표를 이토록 경쾌한 소리로 연주할 수 있음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쾌속 질주하는 템포 속에서도 음 하나하나의 악센트와 음량의 세심한 변화를 끌어내는 파파노의 지휘는 베토벤의 교향곡 2번에서 돋보였다. 특히 1악장에서 포르테(f, 크게)에서 포르티시모(ff, 매우 크게)로 바뀌는 부분에서 정확하게 악보의 강약 기호를 살려내며 극적인 연주를 선보여 경탄을 자아냈다.
물론 '운명'이라는 부제로 익숙한 베토벤 교향곡 5번의 경우 그들의 연주방식은 관객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 느껴지기도 했다.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음 하나하나를 힘주어 소리 내는 연주에 길든 우리 귀에는 지극히 단순하게 음을 처리하는 그들의 연주는 조금 밋밋했다. 대개 다른 오케스트라에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가장 낮은 G선에서 굵은 소리로 연주하곤 하는 4악장의 절정 부분에서도 쉽고 단순한 운지법으로 가벼운 음색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연주가 너무 성의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또한 어둠을 물리치고 광명이 찾아오는 4악장의 주제가 연주되기 전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연주 속도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 없이 곧바로 쉽게 4악장으로 이어졌을 때 약간의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담백하면서 편안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이 반드시 심오하고 진지하고 무겁게 연주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파파노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연주는 그래서 더 특별했다.
공연 전반부에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연주됐다. 파파노가 이끄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자연스럽고 경쾌한 연주 스타일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와 매우 잘 어우러졌다.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는 언제나처럼 섬세하고 자연스러웠지만, 그사이 그의 음색은 좀 더 다채로워지고 표현의 폭이 더욱 넓어진 듯했다. 단호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1악장 제1주제의 리듬을 선명하게 처리해낸 조성진은 아름다운 제2주제에서 그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영롱한 소리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음과 음 사이가 부드럽게 연결해내면서도 음 하나하나를 명확하게 들려주었고 덕분에 주제 선율의 성격은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또한 실내악을 연주하듯 오케스트라와 함께 호흡하며 조화를 이루는 그의 연주도 인상적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돋보여야 할 주제 부분에서 조성진은 적극적으로 연주했지만, 목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마치 그 자신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 듯 부드럽게 반주하며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었다. 힘과 기교로 자아를 앞세우기보다는 음악 그 자체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는 이번 공연에서 단연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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