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이란서 미국 망명한 유명 화가 니키 노주미, 첫 한국 개인전
바라캇서 권력관계 조명한 회화 10여점 전시…"더 많은 작가가 함께해야"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981년 9월 22일, 이란의 촉망받는 젊은 미술가인 니키 노주미는 테헤란 공항으로 달려갔다. "빨리 이란에서 나오라"는 친구 전화를 받고서였다.
테헤란 현대미술관 재개관전에 걸린 그의 작품이 '반혁명적이며 반호메이니적이며 반체제적'이라고 비판하는 기사가 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이란은 1978년부터 본격화한 이슬람 혁명 열기로 어수선했다. 15년간 나라 밖을 떠돌던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듬해 2월 귀국하면서 혁명 불길이 치솟았다.
'반 호메이니' 낙인이 찍힌 젊은 작가 신변이 안전할 리 없었다. "그러한 기사가 난 것도 며칠 뒤 알았어요. 125점에 달하는 그림들을 챙길 새도 없었죠."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작품을 금한 첫 번째 화가"(월스트리트저널)는 수십년간 조국을 찾지 못했다. 노주미(76)는 그런데도 이란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영국박물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그는 이란 국내 조사에서도 '지난 80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5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왜 금지와 환대 대상이 됐을까. 서울 종로구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첫 한국 개인전 '플리즈 싯 다운'을 여는 노주미를 19일 만났다.
2층으로 나뉜 공간에는 대작부터 소품까지 회화 10여점이 걸려 있었다. 오래된 프레스코화를 떠올리게 하는 캔버스에는 가면을 쓰거나 막대기를 든 사람, 사고로 뒤집힌 자동차, 불길이 치솟는 들판, 튀어 오르는 개구리 등 무어라 명확하게 규정하기 힘든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었다.
"제 작업에서는 권력 관계를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접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추상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노주미 작품 인물들은 대부분 권력자와 집행인, 혹은 피해자다. 가면을 쓰거나 바닥을 내려다보기에 권력자 혹은 집행인 진짜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중 누구라도 그들이 될 수 있으며, 이들이 언제라도 얼굴을(정체성을)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위와 '밀당'하는 남자, 이란 옛 서사시에서 힘겨루기하는 캐릭터 등의 모습에서도 권력 관계를 향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인물과 그림자를 바꾸거나, 피에로 문양을 심거나, 캔버스를 여러 층으로 나눔으로써 관람객이 상상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았다.
두 가면남과 의자가 등장하는 작품 '플리즈 싯 다운'은 1970년대 중반 팔레비 왕정이 운영한 비밀경찰 사바크 취조를 받았던 경험에 뿌리를 둔다. 작가는 몇 달씩 매일 의자 2개만 있는 방에서 '침묵의 고문'을 받던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의자'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반전인권 운동이 거셌던 1970년대 전후 미국 유학, 팔레비 왕조와 이를 무너뜨린 이슬람 공화국에서도 계속된 억압과 망명 등의 개인사가 그를 이러한 작업으로 이끈 듯했다.
전시장 안쪽의 식물 작업은 보다 평범해 보이지만, 기후 온난화 문제를 경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바라보며 시작한 작업이라고 했다. "붉고 검은 이파리들은 죽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죠. 아래쪽 벌거벗은 여성은 자연을 향해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미국 유학 당시 사회 격변을 담아내기에는 그림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2년간 붓을 놓았다. 또 이란 이슬람 혁명 때는 스케치북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가 "너무나 극적인 현실 앞에서 스케치북을 든 것에 창피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랬던 작가는 수십 년째 정치·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림 작업에 매진 중이다. 붓의 힘을 믿는 듯한 그는 "더 많은 작가가 이러한 이슈를 작업에 반영해야 한다"라면서 "세계에 이슈가 넘치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같이 해결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강조했다.
'플리즈 싯 다운' 전시는 내년 1월 13일까지.
지척에 있는 바라캇 서울 전시장에서는 중국, 인도,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등의 불교 미술을 소개하는 '찰나와 영원' 전시가 내년 3월 31일까지 열린다. 문의 ☎ 02-730-1949.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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