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방문해 대영박물관 앞에서 기자회견…'눈물 호소'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제발 우리 섬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조상님 석상(石像)입니다."
남태평양상 칠레령(領) 화산섬으로 지난해 자치권을 얻은 '이스터섬'(Easter Island)이 대영박물관을 상대로 유물 되찾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영국을 방문한 타리타 알라르콘 라푸 이스터섬 지사(Governor)는 20일(현지시간) 대영박물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호아 하카나나이아'(Hoa Hakananai's)의 반환을 대영박물관 측에 눈물로 호소했다고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숨겨진 친구'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호아 하카나나이아는 이스터섬 원주민인 '라파누이'가 서기 6~15세기경에 현무암을 깎아 만든 사람 형태의 거대 석상(모아이·Moai)이다.
찡그린 눈매이지만 일직선의 입술에 배가 불룩 나와 다소 이색적인 모습의 이 석상은 현재 대영박물관 24번 룸 입구에 전시돼 있다.
대영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10가지 유물로 거론되는 이 석상은 1868년 이스터섬에 상륙했던 영국 군인들이 무단으로 가져다가 당시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쳤다.
조류 숭배를 해온 이스터섬 원주민들은 불가사의했던 옛날의 여러 의식 장면 등을 표현한 석상을 900여 개나 남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개개 석상은 부족의 지도자나 신격화된 조상으로 숭배됐다. 그중 호아 하카나나이아는 높이 2.13m로 비교적 작은 것이지만 모아이 석상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스터섬 주민들은 호아 하카나나이아가 서기 1000년경 부족 간 전쟁을 종식하고 섬 전체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믿는다고 한다.
라푸 지사는 이날 펠리페 워드 칠레 국유재산장관과 함께 대영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나 유물 반환을 요청한 뒤 전통 복장을 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거의 90세에 돌아가신 제 할머니는 조상님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저도 거의 반세기를 살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조상님을 뵙게 됐다"고 감정에 북받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후손들이 그(석상)를 만지고, 보고, 그에게서 배울 기회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냥 육체만 있을 뿐이고, 영국 사람들이 우리 영혼을 갖고 있다"며 호아 하카나나이아의 반환을 거듭 호소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 측이 이스터섬 주민들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대리석, 나이지리아의 베냉 브론즈 등 영국인들이 과거에 세계 곳곳에서 약탈한 수많은 유물에 대한 반환 요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대영박물관 측은 이스터섬 측의 반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빌려주는 형태의 협상에만 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대영박물관 관계자는 "우리는 세계에서 유물을 대여하는 주요 박물관 가운데 한 곳"이라며 "빌려 받는 쪽(trustee)에선 항상 일반적인 조건으로 대여 요구를 고려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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