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임진왜란 첫 읍성 탈환 승전고 울린 '청주읍성'

입력 2018-11-24 11:00   수정 2018-11-25 12:01

[쉿! 우리동네] 임진왜란 첫 읍성 탈환 승전고 울린 '청주읍성'
1911∼1914년 일제강점기 때 파훼…2013년 옛 서벽 35m 복원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왜군이 파죽지세로 전국 곳곳을 유린하던 1592년 8월.
조선 중기 문신인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대사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읍성을 탈환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내륙에서 울려 퍼진 첫 읍성 탈환 승리였다.
3개월 전인 1592년 5월 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에 버금가는 승전보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는 강점기 초기에 도시 정비를 이유로 청주읍성을 헐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청주읍성이 파훼(깨뜨리어 헐어 버림)된 지 올해로 107년이 됐다.
2013년 12월 읍성 일부 구간이 복원됐지만 원래의 모습은 기록과 사진으로만 볼 수 있을뿐이다.
학계와 문화계는 일제가 짓밟은 역사·문화를 되찾기 위해 청주읍성 전체를 복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청주읍성의 축조 시기를 다룬 문헌 자료는 없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조선 문종 1년(1451년) 때 완성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나 문종 2년 때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절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두 책에는 '청주성 안에 물난리가 났다'거나 '무지개가 떴는데 (그 끝이) 청주성 성벽을 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에 청주읍성이 축성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청주읍성은 조선시대에 수시로 정비됐다.
성종실록에는 성종 18년(1487년) 2월 19일 "청주의 축성은 급한 일이 아니며 이제 듣건대 돌 줍는 군부가 밀과 보리를 밟아버린다고 하니 청컨대 우선 정지하였다가 가을에 쌓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해 가을 본격적인 개축 공사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역사서에는 청주읍성의 규모가 높이 13척, 둘레 5천443척으로 기록돼 있다. 1척이 31㎝라는 점에서 높이는 403㎝, 둘레는 1.687㎞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에도 "읍성은 정조 9년 을사년(1785)에 개축했다. 둘레는 1천427보이고 옹성이 2곳, 문이 4곳, 우물이 12곳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읍성 단위에서 첫 승전고를 울린 곳으로 유명한데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있었던 일이 기록돼 있다.
"공주 목사 허욱이 의승 영규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했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해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해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옛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라고 탄식하며 맞은편 산봉으로 진을 퇴각시켜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이 청주읍성을 탈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무문(북문), 청남문(남문), 벽인문(동문), 청추문(서문) 등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둔 청주읍성이 파훼된 때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이듬해인 1911년이다.
1910년 충북도청 장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스즈키는 '시구개정'(市區改正)이란 명목으로 시가지 도시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1911년 4월부터 1914년까지 읍성 철거를 감행했다.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성돌로 하수구 축대를 쌓고 남문에서부터 북문까지 이어진 간선도로, 지금의 성안길을 만들면서 청주읍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성돌은 하수구 축대 용도로 땅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상일 청주문화원 원장은 "일제가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읍성을 시가지 정비 명목으로 가장 먼저 해체했다"며 "대한제국 군대 해산(1907년 7월) 후 성벽 관리가 제대로 안 된 점이 있지만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청주의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임진왜란 첫 읍성 탈환 전투로 기록된 청주읍성 성벽을 파훼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금은 청주목사가 정사를 봤던 현 청주시 제2청사 안의 동헌, 중앙공원의 충청병영문루와 망선루, 고려시대 당간으로 국보 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 등 읍성 안의 유적만이 유구했던 청주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청주시는 2011년 충북문화재연구원과 함께 중앙공원 서쪽 출입구에서 YMCA 사이 35m 구간의 옛 읍성 기초석 흔적을 확인하고 이듬해까지 발굴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청주문화원과 문화사랑모임 등 4개 지역시민단체는 '청주읍성 성돌 모으기 운동'을 추진해 800여 개의 성돌을 찾았다.
이 가운데 650개의 성돌이 2013년 9월 마무리된 복원공사에 쓰였다.
8억3천여만원이 투입된 복원 사업 결과 청주읍성 옛 서벽 35m 구간이 높이 3.6m, 폭 4.5m의 원형으로 원래 자리에 복원됐다.
청주시는 이 복원 사업을 단절된 청주 역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시는 매년 8월이면 의병과 승병 복장을 한 시민들이 퍼레이드하는 '청주읍성 큰잔치'를 열며 임진왜란 첫 읍성 탈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k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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