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소련시절 탄압 부활?…정권비판자 '과격파'로 검거

입력 2018-11-26 11:08  

러, 소련시절 탄압 부활?…정권비판자 '과격파'로 검거
수사요원이 불평·불만 발언 유도…실체 없는 조직 만들어 덤터기
집권 당원 "이제 세상이 좋게 보이는 '핑크빛 안경' 벗었다"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테러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러시아 젊은이의 부모들이 자식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 확산하고 있다. 당국의 강압적인 수사에 일각에서는 옛 소련 시대의 탄압이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26일 보도했다.


아사히 보도에 따르면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건물 주변에 지난달 28일 500여명이 모여 질서정연하게 선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찰이 확성기로 "길을 트라"고 소리쳤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테러조직 가담' 등의 혐의로 체포된 젊은이들의 석방요구다. 용의자의 부모도 참가한 이 집회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자 "그냥 도로에 서 있는" 형식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참가자 전원의 박수로 단결을 과시했다.
용의자로 체포된 안나 파프리코바(18)의 아버지인 드리트리(50)는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둔 작년 3월15일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이른 아침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경찰'이라는 옆집 사람의 말에 문을 열자 자동소총을 든 검은 마스크 차림의 남성들이 들이 닥치면서 다짜고짜 얼굴을 가격했다. "바닥에 엎드리라"는 고성에 큰 딸은 안고 있던 아기를 던지듯 이불 밑에 숨겼다.
괴한들이 노린 건 작은 딸 안나였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딸에게 "(야당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와 어떤 관계냐", "(러시아가 합병한 우크라이나형) 크림은 우리 것이냐, 아니냐"고 취조하듯 물었다. 완전히 테러리스트 취급이었다.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더니 그대로 체포해 갔다. 과격파 조직 '노보에 베리체(새로운 위대함)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이 조직의 규약에 혁명이 시작되면 적극 참가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다른 9명도 같은 혐의로 체포됐다.
드미트리는 "사건은 특수부대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안나는 사회의 불평등을 한탄하며 학자가 돼 국가에 공헌하고 싶어했다. SNS에서 알게 된 몇 명과 가끔 맥도날드에 모여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했을 뿐 조직은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당국의 수사관이 모임에 잠입, "처자식이 있는데 월급이 적다"고 불평하며 동조자를 끌어 모았다. 토론에 필요하다며 방을 빌리고 전단을 제작할 복사기를 사들인 후 조직의 이름을 생각해낸 것도 바로 그였다. 안나는 1월에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지만 "당신이 필요하다"며 말렸다. 그가 주도해 실체도 없는 '과격파'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끌어들인 셈이다. 드미트리는 "딸은 인생을 망쳤다"면서 "애들을 투옥하는건 러시아의 수치"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3월 FSB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젊은이들을 과격주의로부터 지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사히는 정치가와 인권 활동가 등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최근에는 정치적 배경이 별로 없는 젊은이들이 표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작년 가을께 지방도시 펜자 등에서 그룹 '세치' 멤버가 '테러조직 가담'혐의로 체포됐다. 친족들은 '에어건으로 서로 쏘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며 놀았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5월 모스크바에서 젊은이가 '과격파 조직에 가담하도록 권유'한 혐의 등으로 체포된 사건도 치안당국이 관여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인권활동가 레프 폴노마료프는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한 날조 사건"이라면서 "탄압이 가장 심했던 1937년 스탈린 시대와 같은 공포정치가 시작됐다"고 비판했다.
안나는 현재 자택연금 중이다. 갑작스러운 체포에 충격을 받은데다 유치장의 차가운 마루에서 재우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상했다고 한다. 변호사에 따르면 다른 용의자의 경우 고문흔적도 있지만 사법의 독립성이 의심스러워 유죄가 될 가능성이 있고 장래 취직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인권활동가인 알라 프로로바(53)는 "정부는 젊은이들을 두려워 한다"고 지적했다. 정권의 부패체질과 빈부격차에 의문을 품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려던 야당 지도자 나발니가 주도한 집회에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요구하는 젊은이를 중심으로 지방도시에서 수천명, 모스크바에서는 1만명 규모가 참가했다.
노보에 베리체와 세치 사건 관련 젊은이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법정투쟁을 한다는 입장이다. 부모들도 기자회견이나 집회를 열어 무죄를 호소하고 있다.
딸이 체포당한 나탈리야 세보스치야노바(45)는 여당인 '통일러시아' 당원이다. 선거에서도 소속 후보를 열심히 도왔지만 "사회의 여러 부분을 몰랐었다. 세상이 멋지게 보이는 '핑크 안경'을 이제는 벗었다"고 말했다.
lhy501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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