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30분부터 강진아트홀, '20세기 강진의 갈등과 치유' 주제
(강진=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 1904년, 함경도 회령의 유공율이란 사람이 강진의 작천 박장원에게 6천20냥을 빌려줬다.
일종의 통 큰 투자였다.
도대체 유공율은 무엇 때문에 머나먼 강진 박장원에게 거금을 투자했던 것일까.
또 1907년 한양에 물건을 사러 가던 '병영면의 김서방'은 어떻게 무거운 엽전을 짊어지고 그 먼 길을 갔을까.
강진과 강진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해 매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강진역사문화 학술 심포지엄'이 올해는 이 의문점들을 풀어본다.
올해로 제7회째를 맞은 강진의 토종 학술 심포지엄으로 강진아트홀 소공연장에서 29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까지 열린다.
올해의 주제는 '20세기 강진의 갈등과 치유'다.
20세기 들어 강진사람들이 겪었던 갈등의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강진사람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를 공개한다.
여러 가지 문제들 뒤에 숨어 있는 역사적 뒷이야기도 찾아낸다.
소송문서(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홍기영 순천대교수), 해방후 민간인 학살(주철희 역사연구가), 어촌계 갈등(임선화 전남대교수) 등 강진의 이야기를 다룬다.
함경도 회령 사람의 돈을 쓴 박장원에 대한 이야기, 병영의 상인들이 서울에 물건을 사러 갈 때 쓴 교환수단 등에 대한 이야기는 김덕진 교수의 논문 '민장치부책을 통해 본 한말 강진군민의 갈등'에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민장치부책이란 고소장과 판결문을 관에서 요약해서 문서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당시 판결은 군수가 했다.
유공율이 박장원에게 빌려준 돈을 이자와 함께 찾아주라고 강진군수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6천냥이면 당시 논 300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으로 추정된다. 아주 큰 금액이다.
이에 대한 소송 결과는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기록은 당시 외지사람들이 강진에 큰 규모의 자본투자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덕진 교수는 27일 "강진에는 병영상인들이 대외거래를 활발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의 인연으로 사채형태로 투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기록들을 분석할 때 강진사람들은 함경도뿐 아니라 서울, 경기도 등 여러 지역과 자본거래 흔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강진의 민장치부책을 분석할 때 어음(於音) 또는 환(換)과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환이란 신용화폐로 조선후기 유통경제 발달의 대표적인 증표로 평가받고 있다.
대체로 개성상인이나 서울상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대상인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에서 환이 사용됐다고 보고된 것은 강진 병영이 최초다.
20세기 벽두에 병영뿐만 아니라 강진 전역에서 환이 자유롭게 유통됐음이 밝혀졌다.
'병영의 김서방'이 서울에 물건을 사러 갈 때는 무거운 엽전을 짊어지고 가지 않고 한 장의 환을 지참하고 갔다.
김 교수는 "강진 지역에서의 환 유통은 강진 지역의 유통경제가 발달하고, 상업문화가 높아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했다.
chog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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