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노송동 주민센터입니다."
"네. 동사무소 뒤로 가보세요. 돼지저금통이 있을 겁니다."
짤막한 한 마디에 이어 이내 '뚜뚜'하는 신호음이 울리면서 전화는 끊어졌다.
노송동 직원은 황급히 주민센터 뒤편으로 달려갔다.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A4 용지를 담는 종이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무실로 옮겨진 종이 상자에서는 동전과 지폐가 가득했다. 총 6천27만9천210원이었다.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든 한해 보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년에는 더 좋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적힌 메모지와 함께.
지난해 12월 28일 점심시간 직전 이 전화를 받은 직원은 40∼50대의 중년의 남자가 이 돈을 놓고 간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8년째 노송센터를 찾은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올해도 이어질까.
연말이 다가오면서 전주 시민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는 이 천사가 또 나타날지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나 돈을 넣어둔 종이 상자, 방법 등이 거의 비슷한 점을 고려할 때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나타나 매년 이렇게 한 통의 전화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이 넘는 돈을 놓고서.
2000년에 시작된 기부금액은 지난해까지 총 5억5천813만8천710원으로 불어났다.
호기심 많은 언론 등이 그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선행이 더욱 값지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그의 신원이 밝혀지면 부담감 때문에 선행이 멈출 수 있다"며 과한 관심에 대해 우려했다.
성금은 그간 전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노송동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였다.
홀몸노인과 소년소녀가장, 조손가정 등 어려운 계층을 위해 써달라는 얼굴 없는 천사의 당부에 따랐다.
또 이 동네 초·중·고교에서 10여명의 '천사 장학생'을 선발,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성금이 쌓일수록 수혜 대상자는 더욱 늘어난다.
전주의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전국 각지로 번져 기부 문화를 확산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이 천사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익명으로 기부하는 '천사'가 전국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전주시도 이 기부자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주민센터 주변에 천사 공원과 기념관을 만들었다.
사회 양극화로 소외된 사람들이 늘면서 올해도 '얼굴 없는 천사'가 날갯짓을 하며 나눔의 씨앗을 뿌릴지 전주 시민의 시선은 벌써 노송동으로 쏠리고 있다.
ic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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