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위협 부각해 사우디 정치·도덕적 비난 희석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전 세계가 경악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사우디아라비아가 서방에 뿌리 깊이 박힌 이른바 '이란 포비아'(이란 공포증, 이란 혐오증)를 끌어들여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카슈끄지 살해 사건 뒤 사우디가 개입한 예멘 내전의 인도적 참사에까지 책임론이 번지자 이란의 위협을 방패로 내세우며 자신을 겨냥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이란으로 분산, 전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방패로 보호하려는 최종 대상은 차기 국왕에 오를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다.
사우디 정부가 완강히 부인하는 데도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28일 미국 정부와 미 록히드마틴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사드)를 150억 달러(약 16조8천억원) 규모로 사는 계약을 맺었다.
국제적 비난으로 궁지에 몰린 사우디로서는 '카슈끄지 위기'를 돌파하려면 미국의 지지가 절실한 만큼 거액을 미국에 안긴 이 계약이 현재 사우디가 처한 위기와 무관하다고 보긴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카슈끄지 사건과 관련, 20일 낸 성명에서 살해 자체는 비판하면서도 "사우디는 1천100억 달러(약 124조원)의 무기 계약을 포함해 4천400억 달러(약 508조원)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며 사우디를 옹호했다.
이 성명을 낸 지 일주일 만에 사우디가 정확히 화답한 셈이다.
이 무기 계약을 '면죄부 거래'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성명 첫 줄에서 대뜸 "이란이라는 나라는 예멘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대리전에 책임이 있다. 이란은 세계 최악의 테러지원국이다"라고 맹비난하면서 카슈끄지 사건과 전혀 연관 없는 이란을 거론했다.
이번 사드 계약에 대해서도 미 국무부는 "이란과 이란의 지원을 받는 극단주의 단체들의 탄도미사일 위협 증대에 직면한 사우디와 걸프 지역의 장기적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이란의 위협을 부각했다.
이 계약에 맞춰 무함마드 왕세자의 친동생이자 주미 사우디 대사인 칼리드 빈 살만 왕자는 28일 자신의 트위터에 친이란 예멘 반군을 지지하는 어린이들의 동영상과 함께 "이란이 지원하는 반군은 어린이를 전장에 밀어 넣고 이란 정권의 극단주의 사상으로 세뇌함으로써 어린이의 존엄을 훼손한다"는 글을 올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역시 이날 트위터로 "이란 정권은 예멘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뮬라들(이란의 신정일치 정권)은 이란 서민조차도 돌보지 않는다. 사우디는 예멘의 고통을 덜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쏟았지만, 이란은 '제로'(0)다"라며 이란을 겨냥했다.
사우디 외무부는 이날 "사우디는 16억(약 1조8천억원) 달러가 넘는 독보적인 지원으로 예멘의 고통을 감경한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이란 포비아가 비판적 언론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우디와 이를 비호하는 미국 정부를 묶는 고리이자, 미국 의회도 비판하는 양국의 '면죄부 거래'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 셈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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