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묻힌 독립운동가 홍재하의 '잠들지 못하는 꿈'

입력 2018-12-03 06:11  

프랑스에 묻힌 독립운동가 홍재하의 '잠들지 못하는 꿈'
100년 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자금 모아…최근 공적 재조명
차남, 파리근교 묘소 방문에 연합뉴스 동행…"아버지의 귀국 꿈 꼭 이뤄졌으면"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고국행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프랑스 땅에 잠든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묘소는 파리 근교의 한 위성도시에 있다.
최근 독립운동 공적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홍재하의 차남 장자크 홍 푸안(76)씨는 기자와 함께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홍재하가 1960년 타계한 뒤 60년 가까이 묻혀 있는 소도시 콜롱브(Colombes)를 찾았다.
홍 푸안 씨는 이날 주불한국대사관(대사 최종문)의 연례 국경일 리셉션에 초청받아 파리에 온 김에 행사 참석 전 잠시 틈을 내 아버지를 찾았다.
아침 일찍 거주지인 브르타뉴 지방의 생브리외역을 출발한 홍 푸안 씨는 파리에 도착해 기자의 차로 콜롱브를 방문했다.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50여분을 달려 콜롱브의 초입에 다다르자 그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듯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묘지 앞 꽃가게에서 화분 두 개를 산 그는 부모와 형이 함께 묻힌 묘소를 정성스레 청소한 뒤 화분을 올려놓고는 한참을 물끄러미 묘석을 바라봤다. '홍재하'라는 한글 이름 세 글자와 프랑스 이름인 '르네 홍 푸안'이 뚜렷이 적혀 있었다.
홍재하의 프랑스 내 독립운동의 행적을 예전부터 추적해온 재불 사학자 이장규씨(파리 7대 박사과정)와 홍 푸안 씨의 옆에서 홍재하가 남긴 임시정부 서한 등 기록물 정리를 돕는 김성영 교수(렌 경영대)도 이 짧은 여행에 동행했다.
홍 푸안 씨는 두 동포의 도움으로 최근 본격적으로 부친 홍재하의 프랑스에서의 독립운동 공적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최근 밝혀진 사료들에 따르면, 홍재하는 189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다.
무르만스크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홍재하 등 한인들은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에든버러까지 흘러 들어갔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황기환 서기장을 영국에 급파해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송환될 뻔한 이들 중 홍재하 등 35인을 1919년 프랑스로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홍재하는 이후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 결성을 주도해 이 단체의 2대 회장을 지낸다.
무엇보다 그는 프랑스에서 한인들이 1차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낸 자금책이었다. 임시정부의 황기환이 홍재하에게 돈을 모아 보내준 것에 감사를 표하는 친필 편지가 최근 홍재하의 유품에서 발견된 바 있다.


파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홍 푸안 씨 등 2남 3녀를 둔 홍재하는 '해방만 되면 반드시 가족을 모두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고 홍 푸안 씨는 증언했다.
하지만 홍재하는 곧 해방정국의 극심한 혼란과 한국전쟁의 격랑을 맞게 되고 결국 고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한 채 1960년 암으로 타계했다.홍 푸안 씨는 부친 묘소 참배를 마친 뒤에는 부친이 방과 후에 데리러 오곤 했던 초등학교와 유치원 등으로 동행자들을 안내했다.
"파파(아빠)는 평소엔 참 엄하신 분이었는데, 이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곤 했어요. 여기는 우리 가족이 바게트를 사 먹던 빵집이 있던 자리네요."
그는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사는 한 소박한 주택에 다다르자 옛 기억이 되살아난 듯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홍재하가 조용히 숨을 거두기 전까지 10여 년을 가족이 산 곳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눈가가 촉촉해진 홍 푸안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프랑스에 온 한국인들이 참 많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 한국전쟁 직후 조국의 재건을 걱정하며 한국인들을 먹이고 재우며 밤새 토론하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한국 나이로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홍 푸안 씨의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이 한국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그 이후 부친의 유해가 한국에 안장되는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고도 싶지만, 이제는 나이가 너무 들어 쉽지가 않다고.
모국어인 프랑스어는 물론, 영국에서 엔지니어링과 경영학을 공부해 영어에 능통하고 독일어도 곧잘 하는 그이지만, 유독 한국어를 모르는 것이 요즘처럼 답답할 때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부친은 해방되면 바로 우리 가족은 모두 한국으로 갈 테니까 한국말을 여기서 미리 배울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가면 금방 배운다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말을 좀 배웠다면 좋았을 것을…"
홍 푸안 씨는 기자에게 "고국행의 꿈을 한순간도 놓지 않은 부친의 유해가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조국에 하신 일에 대한 최고의 경의(敬意)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치 한국어처럼 들리는 아름다운 프랑스어였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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