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원자재·항공기 제조 분야서 유로화 결제 늘릴 방안 제시
에너지 거래 등 전략분야 유로 결제 기반 확충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유럽연합(EU)이 세계의 기축통화로 기능하는 미국 달러화 패권(覇權)에 맞서기 위한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배경에는 유럽 국가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체제의 미국이 일방주의로 치달아 경제적 자주권을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달러 패권을 앞세운 미국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수단을 EU 차원에서 찾아 나가겠다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유럽연합이 미국 달러화 패권에 대응하기 위해 에너지, 원자재 및 항공기 제조 같은 전략적인 분야에서의 결제 통화로 유로화 사용을 늘리는 방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5일(현지시간) 유로화가 국제 결제시장에서 한층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청사진을 내놓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구하는 일방적 독주정책으로 EU의 경제적 독립이 한층 중요해졌다는 공감대 속에서 이 청사진을 마련해온 EU는 미국의 공격적인 무역정책을 겨냥해 국제기준에 근거한 거버넌스(관리체제)와 교역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취지로 내세우고 있다.
EU는 우선 달러에 기반을 둔 에너지 관련 계약을 유로화 결제 방식으로 바꾸도록 유도하고, 금융거래에서도 유로화를 매개로 한 거래를 장려해 나갈 방침이다.
아울러 EU 차원의 결제 시스템을 개발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파생 금융상품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달러에 대항해 유로화가 활용될 여지를 넓히기 위해 일부 파생상품 거래의 경우 유로 표시 증권의 현금화가 용이한 청산소를 통한 거래가 이뤄지도록 하는 대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EU는 또 국제 지급수단으로 유로를 사용하고자 하는 아프리카 국가를 상대로 기술적인 지원을 하고, 유로화 표시 차관도 늘려 나갈 계획이다.
FT는 현재 EU 에너지 수입액의 80% 이상이 미 달러화로 결제되고 있다며 EU는 우선적으로 회원국 정부 간 에너지 협정의 틀에서 이뤄지는 에너지 수입 거래가 유로화로 진행되길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거래에서의 결제통화 문제는 거대 원유 수출국인 이란의 핵 문제를 놓고 미국과 유럽연합이 다른 입장을 취하는 상황이어서 한층 중요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 중단과 대 이란 경제제재 해제를 규정한 2015년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한 뒤 지난 8월 1단계 대이란 제재를 복원한 데 이어 최근에는 이란산 원유, 석유화학 제품 거래를 제한하는 2단계 제재를 재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면서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들에 대해서도 일정 유예 기간을 거쳐 제재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행정부와 함께 이란과의 핵 합의를 주도했던 프랑스, 독일, 영국 등 EU 회원국들은 이 합의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U는 미국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이란과의 수출입 결제를 처리할 '특수목적법인'(SPV) 설립도 검토했으나 미국과의 갈등을 우려해 SPC 유치를 꺼리는 분위기가 나타나는 등 현실적인 난관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SPV가 역내 평화와 안전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생산적 조치 가운데 하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FT는 이란과 거래하는 유럽 회사들에 제재를 가해 달러를 무기처럼 활용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경제 및 통화 주권에 대한 인식을 유럽 국가들이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EU는 5일 공개되는 초안을 이달 하순 브뤼셀에서 개최하는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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