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부터 800년간 간척…전시 수도 강화도 식량 확보 목적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1232년(고려 고종 19년) 7월. 고려 최씨 정권은 1차 여몽전쟁이 끝난 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수전에 약한 기마병 중심의 몽골군을 방어하는데 육지보다 섬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천도를 결심한 것이다.
개경뿐만 아니라 인근 연백·해주·파주 등에 있던 주민들도 서둘러 강화로 피난했다.
좁은 강화에서 십여만명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식량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강화도를 지킬 군인이 먹을 식량도 부족했다.
몽골군의 공격으로 전국이 폐허가 돼 공납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고 물길이 막혀 식량을 강화로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식량을 구할 길이 없던 피란민들은 야산을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강화도는 점점 더 황폐해졌다.
당시 정권은 식량 문제의 해답을 '간척'에서 찾았다. 바다를 메워 만든 땅에서 식량을 생산해보기로 했다.
인천 강화도에 드넓은 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이때부터다.
간척으로 강화도는 국내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확대됐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1256년(고종 43년)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를 일컫는 둔전(屯田)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둔전 위치는 현재 강화도 송해면·선원면·불은면 일원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제포(梯浦)와 와포(瓦浦)를 방축해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를 방축해 우둔전(右屯田)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정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도와 가까우면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화도에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간척지를 늘리고 싶어했다. 일종의 학습효과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간척지인 강화군 망월리 구하리 일원에 평야가 생긴 것도 여몽전쟁 이후 고려 공민왕 시절이다.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 강화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11만명을 동원해 선두포언(船頭浦堰)이라는 이름의 제방을 쌓아 제방 안쪽을 육지로 만드는 공사가 추진되기도 했다.
제방을 쌓아 갯벌을 막은 뒤 제방 안쪽을 육지화하는 방식이다.
간척이 진행되는 800여년 동안 강화도의 지도는 변화했다. 간척으로 섬과 섬이 연결되기도 했다.
단군왕검이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도 강화도 옆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에 있다가 간척이 진행되면서 강화에 속하게 됐다.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가 쓴 '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변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보면 강화도 전체 면적 424㎢의 30%가 간척지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최 교수는 "강화지역의 해발 10m 이하 광활한 평지는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이뤄진 인공평야"라고 했다.
간척으로 만들어진 평야에서는 지금도 연간 5만t에 달하는 '강화 섬 쌀'이 생산되고 있다.
강화 섬 쌀이 생산되는 강화 간척지는 마그네슘 등이 풍부해 곡식이 잘 여물고 맛이 좋다고 강화군은 설명했다.
강화군 관계자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강화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강화 섬 쌀은 다른 지역 쌀보다 밥맛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강화는 밤낮의 기온 차 또한 전국 어느 곳보다 뚜렷해 곡식의 상품성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모든 농업용수도 지하수나 빗물로 오염되지 않아 농산물의 품질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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