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렌 거주 김성영·송은혜씨 "고국에 의미 있는 일…큰 보람 느껴"
독립운동가 홍재하 차남이 자택서 보관해온 자료 정리해 국사편찬委에 연락
국편 "이분들 노력 없었다면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 해외에 묻혀있을 뻔"
(생브리외·렌[프랑스]=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정말 현명한 동포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근현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이 프랑스에 계속 묻혀있을 뻔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국외자료조사팀을 이끄는 김득중 편사연구관은 몇달 전 프랑스 브르타뉴지방 렌(Rennes)에 거주한다는 한 동포 부부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대서양 연안의 프랑스 소도시 생브리외(Saint-Brieuc)의 한 가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의 친필 서한, 임시정부의 재무부 포고령,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직 탄핵을 알리는 '독립신문'의 호외(號外) 등 역사학자들의 전문 연구가 필요해 보이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다는 쉽사리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국편에 연락을 취한 이들은 렌 경영대 김성영 교수와 렌2대 음대 송은혜 강사 부부.
이들은 반신반의하는 김 연구관에게 즉시 자신들이 찾아낸 자료들의 일부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전송했고 국편은 연구자들을 모아 곧바로 검토에 착수했다.
이것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탄핵을 널리 알린 1925년 '독립신문' 호외판 등 재불독립운동가 홍재하(1898∼1960)가 남긴 독립운동사 자료들이 최초로 확인된 일의 시작이었다.
렌 경영대에서 경영전략을 가르치는 김성영 교수는 평소 지역사회의 기업인들과 벤처투자자 등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지역사회에서 엔젤투자자로 이름 높은 장자크 홍 푸안(76)이라는 이름의 노신사를 알게 된다.
프랑스인이지만 영국에서 엔지니어링과 경영학을 공부해 영어에 능통한 이 노인은 잘 살피지 않으면 프랑스의 평범한 중산층 백인 신사로 보였다.
처음에는 성(姓)에 있는 '푸안' 때문에 중국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좀 친해지고 나니 그는 자신이 한국말은 못 해도 한국계라고 털어놨다. 부친의 한국 이름은 '홍재하'.
"1960년 파리에서 작고한 부친이 한국에서 100년 전 프랑스로 왔고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고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냈다는 말씀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더라고요."
김성영·송은혜 씨 부부는 한국어를 모르는 장자크 씨가 '아버지가 남긴 자료가 많은데 그 의미를 잘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는 청을 받고 렌에서 차로 1시간가량 걸리는 소도시 생브리외의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장자크 씨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곧 직감했다.
일단 쌓여있던 수많은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게 급선무였다. 주변의 한국 유학생들을 불러모은 이들은 문서를 하나하나 비닐 파일철에 펴서 넣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홍재하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북해, 영국을 거쳐 1919년 프랑스로 건너온 인물로,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의 2대 회장을 지냈다. 당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자금을 댄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존재와 활약상은 최근까지도 거의 잊혀있었다.
그러던 것이 동포 부부의 헌신과 홍재하의 흔적을 예전부터 추적해온 재불 사학자 이장규(파리 7대 박사과정)씨의 기존 연구, 국편의 발 빠른 자료수집 노력이 합쳐지면서 홍재하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온전한 면모를 사후 50여년 만에서야 되찾게 됐다.
국편 김득중 편사연구관은 "사료수집을 위해 국내외의 많은 이들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열의 있고 현명한 분들은 보지 못했다. 홍재하 선생과 그 아드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역사 연구를 위해서도 이분들이 정말 큰 일을 하셨다"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김 연구관에 따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처럼 한 가족에 전해 내려오는 문서들 가운데 근현대사 사료들이 무더기로 나온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국편은 국외자료만 총 1천만건가량을 수집했는데, 보통 외국의 문서보관소 등 공공기관에서 주로 자료를 모은다. 이렇게 홍재하 선생이 남긴 기록물 같은 개인 소장자료가 외국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사례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말했다.
김성영·송은혜 씨 부부는 경영학과 음악학을 전공하고서 프랑스 대학 강단에 서는 학자들이다.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잘 모를지라도 홍재하와 임시정부 인사가 주고받은 서신과 다른 기록물들을 꼼꼼히 정리하고 읽어보면서 이들은 가족·조국·자유 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홍재하와 한국의 가족이 주고받은 절절한 편지들, 임시정부 인사가 돈을 보내줘 고맙다고 쓴 서한, 위중했던 한국의 상황을 알린 옛 신문기사들을 읽는 것은 100여년 전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의 당위를 외쳤던 약소국 투사들이 느낀 희로애락에 고스란히 감정이입이 되는 신기한 체험이었다고.
이들은 자료정리를 하면 할수록 홍재하의 독립운동 공적이 국내에서 제대로 평가될 때까지 차남 장자크 씨를 가까이에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외국에 살면서 이렇게 고국에 뜻깊은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요즘 마음이 뿌듯해요. 저희는 다리를 놓아드렸으니 이제 학자들이 홍재하 선생의 삶을 잘 재조명해서 독립운동의 공적이 제대로 인정받으면 좋겠어요. 장자크 아저씨의 소망이 꼭 이뤄졌으면 합니다."
홍재하의 차남 장자크 씨는 김성영·송은혜 씨를 통해 국편에 부친의 기록물 일체를 기증하기로 했다.
국편은 이 자료들의 보존과 연구를 거쳐 '홍재하 컬렉션'(가칭)을 꾸리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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