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의인열전] ①고의 추돌로 참사 막은 '투스카니 의인'…선행릴레이 기폭제

입력 2018-12-22 10:05   수정 2018-12-22 10:57

[2018의인열전] ①고의 추돌로 참사 막은 '투스카니 의인'…선행릴레이 기폭제

한영탁씨 "워낙 급박한 상황이어서 위기의 운전자 도운 것 당연"
유사한 사고 막은 선행사례 계속 나와…한씨가 촉매제 역할

[※ 편집자 주 = 2018년은 불행한 사건·사고 속에서 샛별처럼 빛난 의인들의 선행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목숨을 구한 이들의 용기는 때로는 감동이 되고,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교훈이 됐습니다. 작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함에도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는 겸손한 한 마디는 사회정의의 가치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2018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든 의인들의 후일담을 들어봅니다.]



(인천=연합뉴스) 강종구 기자 = "기자님도 상대방 차 운전자가 쓰러져 있는 상황인데 그냥 가리라고는 생각을 안 해요. 기자님도 당연히 그 차를 막았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안 그런가요."
일명 '투스카니 의인'(義人)으로 불리는 한영탁(46)씨와 인터뷰 중 그의 반문에 기자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고속도로에서 의식을 잃은 운전자의 차량이 중앙분리대를 긁으며 계속 달리는 긴박한 상황,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면서까지 자기 차로 상대차 앞을 막아서는 행동을 누가 쉽게 할 수 있을까.
한씨의 질문에 기자는 쉽사리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평범한 가장이던 한씨를 일약 국민적 의인으로 만들어준 사건은 올해 5월 12일 발생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토요일 오전 11시 30분, 제2서해안고속도로 조암IC 근처였다.
코란도 승용차 운전자 A(54)씨는 2차로 중 1차로를 이용해 차를 몰다가 갑자기 고통스럽게 '으으'하는 외마디 신음을 내고는 곧바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평소 지병이 있는 A씨가 전날 과로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잠시 의식을 잃은 것이다.
의식을 잃고 조수석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지만 A씨의 발이 가속페달을 계속 밟고 있어서 차량은 중앙분리대를 긁으며 계속 달렸다.
당시 옆 차로를 지나던 운전자 중 3명은 경찰에 신고했다.
의식을 잃은 A씨를 태운 차는 무려 약 4분 간 1.5km를 더 주행했다. 핸들이 돌아갈 경우 빗길 고속도로에서 대형 연쇄 추돌사고가 우려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A씨 차량을 발견한 한씨는 본인의 투스카니 차량 경적을 마구 울려대며 A씨를 깨우려 노력했다.
A씨가 전혀 반응이 없자 한씨는 결국 차량 속도를 높여 코란도 앞으로 간 뒤 브레이크를 밟아 코란도가 자기 차량을 들이받고 멈춰 서도록 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A씨 차량에 받힌 한씨의 차량은 충돌 이후에도 A씨 차량에 의해 약 2∼3m 앞으로 밀려갔다.
두 차량이 모두 정지하자 한씨는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중앙분리대에 차 문이 막힌 운전석의 반대편으로 가 A씨를 깨우기 위해 소리치며 창문을 수차례 강하게 두드렸지만 문은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한씨는 결국 옆 차로에서 서행하던 화물차 기사에게 망치를 빌려 창문을 깬 후 A씨를 차 밖으로 간신히 옮겼다.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던 사고를 온몸으로 막은 순간이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은 코란도 블랙박스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세상에 알려졌다.
누리꾼들은 한씨를 '투스카니 의인'이라고 부르며 그의 의로운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경의를 표했다.
투스카니 제조사인 현대자동차는 한씨에게 신형 '벨로스터' 승용차를 선물했고, LG복지재단은 'LG 의인상'을 수여했다.
한씨는 이후에도 인천경찰청장 표창,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의인상'을 받고 개천절 경축식에 초청받아 개식 선언까지 맡는 등 그의 헌신적인 행동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기억되고 있다.
한씨는 그 일이 있은 지 반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코란도 운전자분이 운전대도 잡지 못한 채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는데, 경찰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어요. 쓰러져 있으니까 우선은 차를 세워야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씨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분을 도왔을 것"이라며 겸손해했다.
한씨의 말처럼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그 '누군가'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5월 29일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갓길 쪽으로 계속 달리는 간질 증세 운전자의 1t 트럭을 자기 차로 막아 세운 박세훈(44)씨, 6월 2일 교통사고 후 의식을 잃은 운전자가 탄 승합차를 맨몸으로 막은 손호진(35)씨, 9월 12일 추돌사고로 속도가 붙은 차량을 화물차로 세워 2차 사고를 막은 오무연(35)씨 등 한씨와 비슷한 의인들이 우리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한씨는 '투스카니 의인'이 의로운 행동을 확산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분들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한씨는 당시 몰았던 투스카니 승용차는 가족 친지의 지인에게 선물했다.
한씨는 "몇 차례나 사양한 끝에 현대차로부터 벨로스터 승용차를 선물 받았는데, 가족 친지 중 한 분이 '투스카니는 좋은 일에 사용된 차니까 주변 어려운 지인에게 선물해서 좋은 기운도 받게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그냥 드렸다"고 말했다.
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한씨는 최근 건설경기 불황으로 일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지난달부터 평택 반도체공장 건설현장에서 2년 일정으로 장기 근무를 할 수 있게 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좋은 일 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또 '큰일 날 뻔했다'며 걱정하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일이 다시 생기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다시 그런상황이라면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까요."
만일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면 어떻게 할 것 같냐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한씨의 답은 명료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아직은 남을 위해 몸을 던지는 의인이 가까이에 있다는 울림을 남긴 답변이었다.
inyo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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